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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03
한자 哈丹侵入
영어공식명칭 Invasion of Kad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90년 5월 6일[음력, 양력 1290년 6월 14일] - 카단 군대, 고려 해양(海陽) 침입
종결 시기/일시 1292년 - 몽골군, 압록강 인근에서 카단 처형
전개 시기/일시 1291년 1월 20일[음력, 양력 1291년 2월 20일] - 카단 군대, 철령 넘어 남하
발생|시작 장소 해양(海陽) - 함경북도 길주군
종결 장소 연기현(燕岐縣) - 충청남도 연기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몽골|고려|동방 3왕가

[정의]

1291년 철원군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가 몽골의 종왕 카단의 군대에 의하여 점령된 사건.

[역사적 배경]

카단[哈丹]의 침입은 몽골 황실의 권력 투쟁에 고려가 직접적으로 휘말리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1287년 몽골에서는 동방 3왕가의 종왕(宗王)이었던 나얀[乃顔]과 카단이 세조(世祖)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나얀의 반란군은 세조의 친정(親征)으로 단기간에 진압되었다. 나얀 반란군의 잔당은 카단의 지휘 아래 1288년 재차 반기를 들었고, 1290년 몽골의 진압 작전에 밀려 고려 경내로 진입하였다. 이후 카단군은 고려 중부 지방까지 횡행하며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경과]

고려는 1290년 1월[음] 몽골에서 돌아온 장군 오인영(吳仁永)으로부터 카단이 고려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1290년 5월[음] 카단군이 해양(海陽)[지금의 함경북도 길주]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이 중앙에 보고되자 고려는 곧바로 몽골에 상황을 보고하고 동계(東界)에서 카단군을 방어하였다. 하지만 카단군은 1290년 11월에 쌍성(雙城)에 진입한 뒤 함경남도 일대에서 백성들을 살육하였고, 해를 넘겨 1291년에는 현 경기도 양평군에 해당하는 양근성(楊根城)을 함락시켰다.

1291년 1월[음] 카단군이 철령(鐵嶺)을 넘어옴에 따라 강원도 일대는 치열한 접전지가 되었다. 당시 철원은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 북단에 위치한, 중부 방어의 최전선이었다. 사료의 부실로 고려군과 카단군의 접전지를 세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철령을 넘은 카단군이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철원이 있었던 만큼 필연적으로 고려군은 철원에서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충지였던 철령이 뚫리면서 카단군의 방어는 용이하지 않았다.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의 선전으로 원주(原州)에 주둔하던 카단군의 기세를 일시적으로 꺾을 수 있었으나, 결국 카단군은 교주도에 난입하여 양근성을 함락시켰고 1291년 4월[음]에는 수도 개경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결과]

고려는 몽골 조정과의 긴밀한 공조를 토대로 카단군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1291년에 세자가 직접 세조를 알현하여 토벌군 파견을 요청하자 세조는 나만다이[那蠻歹]에게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원조할 것을 명령하였다. 1291년 4월[음] 전열을 정비한 여몽연합군은 다음 달에 카단군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1291년 6월[음] 연기현(燕岐縣)에서 잔병들을 처리하며 사태를 수습하였다. 1292년 고려를 다시 침입하기 위하여 준비 중이던 카단이 압록강 인근에서 몽골군에게 살해됨으로써 동방 3왕가의 반란에서 비롯된 전쟁은 최종 마무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카단의 침입을 계기로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학계의 평가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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