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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04
한자 蒙古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53년 07월 8일[음력, 양력 1253년 8월 3일]연표보기 - 몽골의 5차 고려 침입
종결 시기/일시 1254년 1월 3일[음력, 양력 1254년 1월 23일] - 몽골군 철수
전개 시기/일시 1253년 08월 27일[음력, 양력 1253년 9월 21일]연표보기 - 몽골군 동주산성 함락

[정의]

1253년 강원도 철원 지역에 몽골군이 침입한 사건.

[개설]

1253년 강원도 철원 지역에 몽골군이 5차로 침입하여 동주산성(東州山城)을 함락시켰다. 충주산성 전투로 야굴이 지휘하는 몽골 군대가 철수하였다. 동주는 현령의 관할지로 강등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 경내의 거란유종(契丹遺種)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조우하게 된 몽골과 고려는 1219년 강동성(江東城) 전투를 계기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맹약의 요지는 고려에서 매년 동진(東眞)을 경유하여 몽골에 세공(歲貢)을 바치는 것이었다. 세공의 양이 막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 파견되는 몽골 사신들의 행실이 고려 조정에서 문제시되었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늘 갈등의 소지가 존재하였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을 계기로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1231년 몽골은 살례탑(撒禮塔)을 선봉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후 1차 침입에서 몽골군의 막강한 위세를 경험한 고려는 앞에서 화친을 제의하고 뒤에서 강화 천도를 감행하여 장기간의 항전에 돌입하였다. 몽골은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와 출륙(出陸), 즉 육지의 개경으로 환도할 것 등을 요구하며 강도 높게 고려를 압박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고려 지방민들의 저항, 몽골 내부의 황위 계승 분쟁, 남송(南宋) 정벌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침입과 철수를 반복하게 되었다.

[경과]

1251년에 황위 계승 문제를 일단락 지은 몽골은 새로운 황제 헌종(憲宗)의 명령으로 1253년 4월[음]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요구하였다. 1253년 7월 원수(元帥) 야굴(也窟)의 지휘 하에 5차 고려 침입이 시작되어 몽골의 군대는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 지역]와 동계(東界)로 동시 진입하였다. 특히 서해도 방면으로 남하하던 몽골군은 1253년 8월[음] 양산성(椋山城)을 함락한 뒤 곧이어 동주산성을 함락시켰다. 동주가 개경 지척에 있는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고려 조정에서 출륙을 약속하며 회군을 요청하였으나 야굴은 직접 출륙하는 모습을 확인할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춘주성(春州城) 등 지역 거점을 함락시켰다.

몽골의 5차 침입 시 동주산성을 담당하던 인물은 방호별감(防護別監) 백돈명(白敦明)이었다. 백돈명은 항전을 위하여 백성들을 산성에 몰아넣고 출입을 금하였는데, 가을 수확철이었음에도 백성들이 논밭에 나가 수확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여 민심을 잃고 패전하였다. 민심의 이반을 확인한 백돈명 휘하의 군졸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고, 결국 백돈명과 동주의 부사(副使) 및 판관(判官), 금성현령(金城縣令)은 몽골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결과]

빠른 속도로 남하하던 야굴의 몽골군은 충주(忠州)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겪게 된다.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이었던 김윤후(金允侯)의 활약으로 발이 묶이게 된 것이다. 야굴은 충주산성 전투 도중 병을 얻어 서둘러 철수하였다.

몽골의 5차 침입이 일단락되자 1254년 2월[음] 고려 조정은 패전 지역에 대하여 징벌적 조치를 내렸다. 양주(襄州)와 동주를 현령(縣令)의 관할지로 강등하고 금성을 감무(監務)의 관할지로 강등한 것이다. 군사요충지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몽골군에게 쉽게 진로를 내준 것이 징벌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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