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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70
한자 -韓國勞務團
영어공식명칭 Korean Service Corps
이칭/별칭 노무대,노무부대,지게부대,A부대,보국대,노무단,KSC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51년 06월연표보기 - 한국노무단(KSC) 창설

[정의]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전투 수행을 도운 한국인 노무자 부대.

[개설]

6·25전쟁 중에 철원 주민들은 남으로도 북으로도 가지 못한 채 전쟁터에 남았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었고 1951년 봄, 철원 주민들은 미군의 주민 소개 작전으로 후방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경기도 포천 문하리가 철원 피난민 1차 집결지였는데, 이때 철원의 청년들은 한국노무단에 편성되어 전선에 노무자로 보내졌다. 철원의 노무부대 대원들은 군번 없는 용사로 전쟁에 참가해 전쟁터에서 군인과 함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설립 목적]

유엔군은 1951년 6월 포탄이나 식량 같은 보급품을 전장에 적시에 운반하기 위해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 KSC]’을 창설하였다.

[변천]

한국노무단의 동원 대상자는 35세부터 45세까지의 남성으로 제한되었으나 10대 소년부터 60대 이상의 노인까지 동원되었다. 복무 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동원 실적이 부진할 경우 복무 기간이 연장되기도 하였다. 한국노무단은 1951년 말 6만여 명, 1952년 말 7만 5000명이 동원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유엔군에 의해 운용된 한국노무단 노무자는 3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무대원들은 군인은 아니었지만 전시 상황이 급박할 때는 총을 들고 싸웠다. 한국노무단은 기록에 남은 희생자만 총 8,794명이고 정확한 실종자 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간신히 살아남은 노무대원의 귀향길에는 종군기장(從軍紀章), 징용 해제 통지서, 열차승차권이 전부였다고 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한국노무단은 전선 부대에 탄약, 포탄, 연료, 식량, 식수 등의 보급품을 운반하는 한편 진지 참호 구축, 막사 건설, 철조망 가설, 전사자·부상자 후송, 도로와 교량 보수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철원의 노무대원들은 공산 치하에서 건설되기 시작하여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승일교 공사에 동원되어 1952년 여름 완공하였다. 노무자들의 운반 수단은 주로 지게나 멜빵이었다. 주요한 운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지게가 영어 알파벳 ‘A’를 닮았다고 하여 유엔군들은 한국노무단을 ‘A Frame Army’[지게부대]라고 불렀다. 철원의 노무대원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고지에 탄약과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지게로 지고 하루에 두 번씩 금학산을 오르내렸다. 또한 백마고지 최전선에 철조망을 가설하였으며, 갈현고개 꼭대기에 참호도 파는 등 고향 근처 전쟁터에서 전쟁 수행을 도와 인민군 남하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황]

미국 워싱턴의 6·25전쟁 참전 용사 기념공원에는 참전 용사들의 모습과 함께 노무대원들이 탄약을 운반하는 모습도 함께 새겨져 있다. 2019년 현재 철원 출신 한국노무단은 겨우 모임의 명맥만 유지한 채 10여 명만 생존하여 있다.

[의의와 평가]

한국노무단은 유엔군과 함께 온 전장을 누비며 전투 근무 지원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군의 전투 병력이 전투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6·25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이었던 제임스 A. 밴플리트는 “만일 한국노무단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야만 했을 것”이라며 한국노무단의 활동을 크게 치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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