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559
한자 適骨山烽燧址
영어공식명칭 Jeokgolsan Signal-fire
이칭/별칭 중군봉봉수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 산43|강포리 산44|강포리 산45|강포리 산30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경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 - 적골산봉수지 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 현황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4년 3월 28일~1994년 4월 16일 - 적골산봉수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4년 5월~1995년 4월 - 적골산봉수지 강원대학교 박물관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6년 3월~1996년 11월 - 적골산봉수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6월 14일~2005년 12월 12일 - 적골산봉수지 강원문화재연구소 광역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6년 - 적골산봉수지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지표조사
현 소재지 적골산봉수지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 산43 지도보기|강포리 산44지도보기|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 산45지도보기|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 산30 일대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1-1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문화재연구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문지동 472]
출토 유물 소장처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성격 봉수터
크기(높이,길이,둘레) 장경 9칸[16.2m]|단경 4칸[7.2m]

[정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 터.

[개설]

적골산봉수지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와 경기도 포천군 자임리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250m의 중군봉 정상부에 있다. 조선 시대 내지(內地) 봉수로 중군봉봉수지라고도 부른다. 적골산봉수는 조선 시대 사서 기록에는 모두 적골산봉수로 표기되어 있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기록부터 중군봉봉수로 표기되었으며, 현재 주민들도 중군봉봉수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중군봉봉수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건립 경위]

적골산봉수『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여지도서(輿地圖書)』[1757], 『영평읍지(永平邑誌)』[1842~1843], 『여도비지(輿圖備志)』[1849~1864]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위치]

적골산봉수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에 있다. 국도 제43호를 타고 송정검문소삼거리에서 연봉제삼거리 방향으로 약 2.5㎞를 이동하면 왼쪽으로 태양연립 방향의 포장도로가 나온다. 적골산봉수지는 왼쪽 중군봉 정상에 있다. 적골산은 중군봉의 약 1㎞ 뒤쪽에 있는데 봉수가 입지할 조건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중군봉 정상부에 적골산봉수지가 있었던 것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

적골산봉수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장경 9칸[16.2m], 단경 4칸[7.2m]의 봉수대 규모가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현황]

적골산봉수는 현재 군 진지가 개설되어 있어 봉수지와 관련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정상부에는 1983년 세워진 중군봉(中軍峰) 비석이 있다. 적골산봉수지는 1992년 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가 현황 조사를 실시하였다. 1994년 3월 28일부터 1994년 4월 16일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기와편을 채집하였다. 1994년 5월부터 1995년 4월까지 강원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하였다. 1996년 3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기와편을 채집하였다. 2004년 6월 14일부터 2005년 12월 12일까지 강원문화재연구소가 광역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정확한 지리 좌표를 확인하였다. 2006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기와편, 자기편을 채집하였다. 주변에 관련 유물들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으며, 주로 소량의 기와편이 채집되어 보고되었다.

[의의와 평가]

적골산봉수와 관련된 조선 전기 기록에는 북쪽으로 소이산봉수와 대응하고, 남쪽으로 미로곡봉수와 대응한다고 하였다. 이후 기록부터는 북쪽으로 할미산봉수, 쪽미로곡봉수와 대응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시기별 대응 봉수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골산봉수지는 함경도 경흥에서 서울 목멱산으로 통하던 직봉(直烽)의 제1횃불이 연결되는 중요한 봉수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에 학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