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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45
한자 道詵國師
이칭/별칭 옥룡자(玉龍子),도승(道乘),요공국사(了空國師),선각국사(先覺國師)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27년연표보기 - 도선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841년 - 도선 출가
출가|서품 시기/일시 849년 - 도선 혜철로부터 구족계를 받음
수학 시기/일시 846년 - 도선 혜철 문하에서 선법 전수
활동 시기/일시 864년 - 도선 옥룡사 중수
몰년 시기/일시 898년 03월 10일연표보기 - 도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172년 - 옥룡사선각국사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53년 - 도갑사도선국사수미선사비 건립
출생지 영암 - 전라남도 영암군
학교|수학지 화엄사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황전리 12]
학교|수학지 대안사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원달리 20] 태안사
활동지 옥룡사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활동지 도갑사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로 306[도갑리 8]
성격 승려
성별

[정의]

궁예철원 천도 관련 설화에 등장하는 신라 하대 선승.

[가계]

도선(道詵)[827~898]의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도승(道乘)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35년 동안 옥룡사(玉龍寺)의 주지로 있었기 때문에 옥룡자(玉龍子)로 불리기도 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서얼손(庶孽孫)이라는 설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씨(姜氏)라는 기록과 최씨(崔氏)라는 기록이 각각 옥룡사선각국사비(玉龍寺先覺國師碑)와 도갑사도선국사수미선사비(道岬寺道詵國師守眉禪師碑)를 통하여 전한다.

[활동 사항]

도선은 827년(흥덕왕 2)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月遊山)[현 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嚴寺)에서 불법을 익혔다. 846년 동리산문(桐裏山門)을 연 혜철(慧徹)에게서 선법을 전수받았으며, 849년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도선은 승려가 된 뒤 명승지들을 찾아다니며 수행하고 음양오행술과 풍수지리를 익혔다. 864년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에 있던 오래된 절 옥룡사(玉龍寺)를 중수하여 35년간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의 초청으로 잠시 경주에 머문 적이 있으나 얼마 후 자청하여 옥룡사로 돌아왔다. 898년(효공왕 2) 3월 10일 사망하였다.

도선의 행적이나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도선이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만큼 전국 각지에 도선이 등장하는 신묘한 설화가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때 도선이 도성의 입지에 대하여 조언하였다는 설화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을 예언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궁예철원 천도를 앞두고 새로운 도성지를 물색하던 시기 도선금학산(金鶴山)을 진산(鎭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궁예도선의 견해를 무시하고 고암산(高岩山)을 진산으로 삼아 결국 일찍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당나라에서 일행(一行)의 지리법을 익힌 도선이 송악(松嶽)을 찾았다가 곡령(鵠嶺)에 지은 용건(龍建)[훗날의 왕륭(王隆)]의 집을 본 후 풍수지리에 따라 집을 중수하면 아들을 얻을 것이며 그 아들이 삼한(三韓)을 통일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사상과 저술]

도선은 동리산문을 대표하는 선승이었으나 후대에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욱 명망을 떨쳤다. 『고려사』에 따르면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밀교 승려였던 일행으로부터 지리법을 배워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일행은 8세기 인물로 도선보다 100여 년 앞서기 때문에 직접 도선에게 풍수지리를 전수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풍수지리를 배우게 된 경로와 관련하여 「옥룡사선각국사비」에서는 도선이 지리산의 이인(異人)을 만난 후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더욱 음양오행을 궁구하였다고 전한다. 어떠한 계기로든 풍수지리를 익힌 도선은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 등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도선의 사상은 고려 시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묘소]

도선이 옥룡사에서 사망한 후 효공왕이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기 때문에 옥룡사에 도선의 부도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1997년의 옥룡사 발굴 조사에서는 도선의 부도로 추정될 만한 신라 시대 유구가 발견되었다.

[상훈과 추모]

도선이 사망하자 신라 효공왕은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증성혜등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문인 홍적(洪寂) 등이 비문을 요청하자 효공왕은 박인범(朴仁範)에게 명령하여 글을 쓰게 하였으나 남북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비석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고려 건국 후 도선왕건의 탄생을 예언하였다는 이유로 현종은 도선을 대선사(大禪師)로, 숙종은 왕사(王師)로,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증하였다. 의종 대에 이르러 최유청(崔惟淸)이 왕명을 받들어 선각국사비의 비문을 썼는데, 무신정변 등으로 비석이 만들어지지 못하다가 1172년(명종 2년) 옥룡사에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 효종 대인 1653년에는 도선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 도갑사도선국사수미선사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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