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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75
한자 金昌翕
영어공식명칭 Kim Changheup
이칭/별칭 자익(子益),삼연(三淵),문강(文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성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김창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김창흡 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김창흡 기사환국으로 영평과 철원에 은거
몰년 시기/일시 1722년(경종2)연표보기 - 김창흡 사망
출생지 한양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용화동 진사골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지도보기
성격 문인|학자
성별

[정의]

조선 후기 철원 지역에 은거하였던 학자.

[가계]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척화파 대신이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형은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이고, 동생은 김창업(金昌業)·김창즙(金昌緝)·김창립(金昌立)이다.

[활동 사항]

김창흡은 1653년(효종 4) 한양[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1673년 아버지 김수항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북악산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문수학한 친구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숙종 7) 장악원주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창흡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진도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영평(永平)[현 경기도 포천시]과 철원에 은거하였다. 이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절도에 유배된 형 김창집마저 사사(賜死)되자 1722년(경종 2)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김창흡은 철원의 삼부연폭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호를 삼연이라 지었으며, 명성산(鳴聲山) 입구 느치계곡에서 용화동 진사골까지 넘어오는 석천계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석천곡기(石泉谷記)」를 남겼다. 김창흡은 「석천곡기」에서 골짜기의 조그마한 못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문과 저술]

김창흡의 저서로는 『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瀋陽日記)』가 있다. 김창흡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이자 대문장가였고,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경향을 띠었다.

[참고문헌]
  • 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 『철원군지』上·下(철원군, 199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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