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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081
한자 鐵原炬火待令
영어공식명칭 Cheorwon Geohwadaeryeong
이칭/별칭 철원 횃불싸움놀이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놀이/놀이
지역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집필자 유형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재현 시기/일시 1984년 06월연표보기 - 철원 거화대령 제2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여하면서 재현
성격 민속놀이
노는 시기 정월대보름
관련 의례 행사 김응하 장군 추모제

[정의]

강원도 철원군의 철원읍 화지리동송읍 오덕리에서 정월대보름에 행하던 민속놀이.

[개설]

정월대보름이 되면 강원도 철원군의 철원읍 화지리동송읍 오덕리 두 마을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석전과 횃불싸움놀이, 솔다리놓기 등의 민속놀이 행사가 벌어지는데, 이를 철원 거화대령, 또는 철원 횃불싸움놀이라고 한다.

원래 강원도 지역은 대보름이 되면 산에 올라 달맞이를 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이때 횃불을 먼저 크게 올리는 것을 두고 마을끼리 경쟁하면서 자기 마을 횃불로 상대 마을 횃불을 때려 넘어뜨리는 횃불싸움놀이가 벌어지곤 하였다. 특히 철원 거화대령은 조선 후기 광해군 때 무신으로 활약한 철원 출신 충무공 김응하(金應河)[1580~1619] 장군의 추모제가 열리기 전날 전야제로 행하여지면서 행사가 강원도 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 확대되었다.

[연원]

철원 거화대령김응하 장군의 싸얼후산[薩爾滸山]싸움을 기리면서 시작되었다. 싸얼후산싸움은 1619년(광해군 11) 후금의 누르하치가 싸얼후산에서 명나라 군사와 벌인 전투로, 명나라가 여기서 패함으로써 국운이 크게 쇠하고 청나라로 교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응하는 지금의 철원군 동송읍 강산리에 속하는 철원군 어운동면 하갈리에서 태어난 무신으로, 명나라의 원군으로 출전하여 후금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결국 싸얼후산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일반적인 민속놀이로서의 횃불싸움놀이가 김응하 장군 추모제와 결합하면서 철원 거화대령으로 확대된 시기에 관하여는 밝혀진 바가 없다.

한편, 철원 거화대령화지리오덕리 두 마을에 필요한 토목공사와도 관련이 있다. 두 마을 사이에 놓인 솔다리는 화지리오덕리 두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오덕리 사람은 강 건너 화지리에서 나무를 하였고, 화지리 사람은 농토가 있는 오덕리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둘 사이를 오가려면 솔다리를 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솔다리는 임시로 세운 다리여서 해마다 보수할 필요가 있었다. 두 마을에서는 새해의 대보름날에 편을 갈라 석전과 횃불싸움을 벌였고, 지는 쪽에서 석전에 쓰인 돌들을 이용해 솔다리를 손보았다고 한다. 1930년대에 새로운 다리가 세워진 후에도 솔다리를 놓고 솔다리를 밟는 풍속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철원 거화대령은 조선 후기까지 진행되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중단되었다. 1984년 6월 제2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여하면서 최승순 교수의 고증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놀이 도구 및 장소]

화지리오덕리 사이의 대교천 주변에서 행하여지며, 대교천 동서편에 각각 진을 치고 석전에 사용되는 돌과 횃불 등을 준비한다.

[놀이 방법]

먼저 대보름을 맞아 달맞이를 하고 나면 양편 마을 풍물패의 가락에 맞추어 대교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싸움 준비를 한다. 투석전으로 시작하여 횃불싸움으로 고조된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양편 심판들이 싸움을 중지시킨다. 심판들이 판정을 내리면 패한 편에서 다리를 놓는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나이만큼 다리를 여러 번 건너면서 소원성취를 빈다. 두 마을 사람들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한데 어울려 놀이마당을 벌인다. 풍물패를 앞세우고 김응하 장군의 사당인 포충사로 향하여 제사를 올린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철원 거화대령김응하 장군 추모라는 역사적 의미와 마을에 필요한 토목공사라는 실용적 필요가 결합된 민속놀이이다. 이를 통하여 두 마을 사이에 수시로 빚어지는 불화 등을 일소하고 화합과 결속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한편, 정월대보름에 여자들이 나이만큼 솔다리를 건너면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는 믿음이 전하고 있다. 또한, 횃불싸움을 할 때 횃불을 든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아 마치 횃불이 꽃밭 같다고 하여 화전리(花田里)[화지리의 옛 이름]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유래도 전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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