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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102
한자 弓裔-土城
영어공식명칭 The Death of Gungye and the Fortress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태봉,현대/현대
집필자 최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8년 6월 30일 - 「궁예의 죽음과 토성」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포1리 경로당에서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궁예의 죽음과 토성」 철원군에서 발행한 『철원군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5년 - 「궁예의 죽음과 토성」 강원도·철원군에서 발행한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0년 - 「궁예의 죽음과 토성」 철원문화원에서 발행한 『철원향토지』 4권에 수록
관련 지명 토성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1005 지도보기
채록지 지포1리 경로당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명성로157번길 8[지포리 44-1]지도보기
성격 인물 설화

[정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에 있는 토성과 궁예의 죽음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궁예의 죽음과 토성」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에 있는 토성(土城)과 궁예(弓裔)[?~918]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왕건(王建)[877~?]에게 쫓긴 궁예갈말읍에 토성을 쌓고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 날 삼방골짜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채록/수집 상황]

「궁예의 죽음과 토성」은 1988년 6월 30일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포1리 경로당에서 채록하였다. 「궁예의 죽음과 토성」은 1992년 철원군이 발행한 『철원군지』와 1995년 강원도·철원군이 발행한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되었고, 또한 철원문화원에서 2000년에 발행한 『철원향토지』 4권에도 수록되었다.

[내용]

궁예태봉국(泰封國)이 멸망하고 쫓겨 가는 길에 갈말읍에 토성을 쌓고 하룻밤 묶어 갔다고 한다. 궁궐에서 나온 궁예갈말읍 울음산[명성산(鳴聲山)]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뒤쫓아 온 왕건울음산에 도착하여 보니, 수백 길 되는 석벽으로 이루어진 산이라서 발을 붙일 곳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 달밤에 밖으로 나온 왕건궁예의 항복을 받아 낼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백발의 노인이 소를 몰아 밭을 가는 것을 보았다. 돌이 많이 있어서 소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돌을 앞발로 차고 있었다. 그러자 백발의 노인이 소고삐를 잡아당기면서 “이놈의 소, 꼭 왕건 태조같이 미련한 놈의 소로구나. 돌아가야지. 넘지 못하는 바윗돌을 어찌 넘어가려고 그래.”라며 채찍으로 소의 등을 내리쳤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왕건이 “여보시오. 왜 한밤중에 밭을 가십니까?”라고 물어보니, 노인이 “밤에 선선한 것이 좋아 그렇소. 달밤이라 훤히 보이고.”라고 하였다. 이어서 “미련하잖소? 산이 소 형국인데, 꽁무니로 가서 툭 걸어야지.”라고 하였다. 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왕건은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산을 가만히 살펴보니 뒤로 돌아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왕건은 군사들을 이끌고 뒷길로 산을 올라가 궁예를 쫓았다. 궁예왕건이 들이치자 울면서 도망쳤다고 한다. 이후로 그 산을 ‘울음산’이라 불렀다. 울음산에서 빠져나온 궁예는 한숨을 쉬었다는 ‘한숨모퉁이’를 돌아 토성리로 들어가 흙을 모아서 토성을 쌓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칼을 짚고 뛰었다는 ‘금불낭’을 지나 ‘삼방골짜기’로 들어섰는데, 농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궁예를 때려서 죽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궁예의 죽음과 토성」은 도망가는 궁예를 기본 모티프로 하고 있다. 태봉국의 멸망과 궁예의 쫓김, 그리고 죽음에 얽힌 지역의 지명이 함께 전하여진다. 특히 「궁예의 죽음과 토성」에서는 궁예를 뒤쫓는 왕건을 백발 노인이 도와줌으로써 왕건에 의한 정권 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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