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침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02
한자 東眞侵入
영어공식명칭 Invasion of Dong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49년 9월 1일[음력, 양력 1249년 10월 8일]연표보기 - 동진군의 동주 1차 침략
발생|시작 시기/일시 1257년 윤4월 9일[음력, 양력 1257년 5월 24일]연표보기 - 동진군의 동주 2차 침략
발생|시작 장소 동주 - 강원도 철원군
성격 전쟁

[정의]

13세기 중반 여진족 계통의 동진이 강원도 철원 지역을 두 차례 침략한 사건.

[개설]

동진(東眞)은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浦鮮萬奴)가 건국한 대진(大眞)과 동하(東夏)를 고려에서 통칭한 용어이다. 고려와 동진은 갈등과 화친을 반복하다가 1232년 몽골의 침략에 맞서 공조 관계를 모색하였으나, 1233년 동진의 멸망으로 공조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고려에서는 동진의 잔당들에 의한 침략이 간헐적으로 발생하였다.

[역사적 배경]

13세기 초 동북아시아는 칭기스칸[成吉思汗]의 몽골 통합으로 일대 변혁기를 맞이하였다. 1211년 칭기스칸의 몽골군은 금나라를 침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패배한 금나라 전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1212년에는 금나라에 복속하였던 거란족 수장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무리를 이끌고 금나라로부터 이반하여 스스로를 요왕(遼王)이라 칭하였다. 야율유가의 토벌을 위하여 금나라에서 파견한 요동선무사(遼東宣撫使) 포선만노는 1215년 일부 여진족을 규합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대진, 연호를 천태(天泰)로 선포하였다. 이후 포선만노는 칭기스칸에게 쫓겨 고려와 국경을 맞댄 두만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국호를 동하로 변경하였다. 대진과 동하는 고려에서 동진으로 통칭되었다.

고려는 1216년 금나라의 서한을 통하여 동진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1217년 고려는 동진의 침략을 받았다. 동진은 몽골과의 관계에 따라 고려에 대한 태도를 계속 달리하였다. 몽골에 복속한 시기에는 고려에 침입한 거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하여 몽골군과 함께 고려에 오기도 하였고, 몽골과 갈등하는 시기에는 고려를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고려 또한 몽골을 의식하여 동진에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1232년에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양국이 공조를 모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233년 포선만노가 몽골군에 사로잡혀 동진이 멸망함에 따라 양국의 공조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동진의 국가적 실체는 사라졌으나 동진을 구성하던 여진족 잔당들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변경에 출몰하였던 듯하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1233년 이후에도 동진의 침략 기사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해당 기사들에서 동진은 북쪽 변경의 여진족 잔당들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233년 이후 발발한 동진의 침략은 국소적인 약탈전의 성격이 강하였을 것이다.

[경과]

1249년 9월[음] 현 강원도 철원군에 해당하는 동주(東州) 지역에 동진군이 침입하자 고려는 즉각적으로 별초군(別抄軍)을 보내어 방어하였다. 지유(指諭) 박천부(朴天府)가 이끄는 별초군은 고성(高城)과 간성(杆城)에서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1257년 4월[음]에도 동진군이 동주를 침략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하였는지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1257년 5월[음]에 분사어사(分司御史) 안희(安禧)가 동북면의 영풍(永豊)에서 동진군을 공격하여 무기와 포로 등을 되찾았다는 기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군은 한 달 동안 동진군을 추격하여 동주 등지에서 노략질한 물자와 포로를 회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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