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50
한자 崔瑩
이칭/별칭 무민(武愍)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16년연표보기 - 최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52년 - 최영 조일신의 난 평정
활동 시기/일시 1354년 - 최영 고우성 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356년 - 최영 압록강 서쪽 8참 공격
활동 시기/일시 1359년 - 최영 서경에 침투한 홍건적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62년 - 최영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 수복
활동 시기/일시 1363년 - 최영 흥왕사의 난 평정
활동 시기/일시 1364년 - 최영 덕흥군과 원나라 군대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74년 - 최영 제주 목호의 난 평정
활동 시기/일시 1376년 - 최영 홍산대첩으로 왜구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최영 이인임 일파 숙청
활동 시기/일시 1388년 6월 - 최영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각
몰년 시기/일시 1388년 12월연표보기 - 최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396년 - 조선 태조가 최영의 시호 상정을 명령
출생지 고봉현 - 경기도 고양시
유배|이배지 고봉현 - 경기도 고양시
유배|이배지 합포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유배|이배지 충주(忠州) - 충청북도 충주시
묘소|단소 최영장군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사당|배향지 제주최영장군사당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대서4길 3-13[대서리 155]
사당|배향지 통영최영장군사당 - 경상남도 통영시 진촌2길 118[금평리 150]
성격 무신
성별
대표 관직 문하시중

[정의]

고려 후기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역인 동주를 본관으로 둔 무신.

[개설]

최영(崔瑩)[1316~1388]은 고려 공민왕 대와 우왕 대에 걸쳐 활약한 무신이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으로 원나라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원나라의 군사적 위협을 막는 데 기여하였으며, 수차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요동 정벌을 추진하던 중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각하고 목숨을 잃었다.

[가계]

최영의 본관은 동주(東州)이고,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아버지는 동원부원군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 봉산지씨(鳳山智氏)이다.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와의 사이에 아들 최담(崔潭)을 두었고, 천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우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영비(寧妃)에 책봉되었다.

[활동 사항]

최영은 1316년 고봉현[현 경기도 고양시]에서 태어났다. 양광도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를 잡는 데 전공을 세워 명성을 떨쳤다. 공민왕 즉위 후인 1352년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이 제수되었고, 1354년에는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과 함께 고우성(高郵城) 전투에 참전하여 선전하였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본격화되자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략하여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동북면체복사와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 등을 역임하면서 수차례 왜구를 격퇴하였다.

1359년 서북면병마사로서 변경을 수비하던 중 홍건적의 1차 침입이 발발하자 서경에서 홍건적을 격퇴하였다. 2년 뒤인 1361년에는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하였는데, 1362년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여 1363년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1363년 흥왕사(興王寺)에서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변란이 발생하자 최영은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지켜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364년에는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앙심을 품은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을 새로운 왕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보내 고려 변경을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위사로 삼아 이성계 등과 함께 원나라 군대를 막아내었다. 이후에도 최영은 꾸준히 원나라 군대와 왜구를 막는 전투에서 활약하며 고려를 수호하였다.

1365년에는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유배되었으나,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4년에는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가 되어 제주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376년(우왕 2)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왜구의 기세를 꺾었다. 1377년에는 우왕이 잦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철원으로 천도할 것을 제안하자 앞장서서 천도 논의를 막았다.

1388년은 최영에게 가장 극적인 시기였다. 우왕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부정을 저질러 왔던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을 제거한 뒤 최영은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영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영비로 책봉함으로써 최영과의 결속을 공고히 하였다. 얼마 후 고려와 명나라는 철령위(鐵嶺衛) 설치 문제를 놓고 극도의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우왕과 문하시중이던 최영은 명나라의 일방적 통보에 분노하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이성계 세력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피력하며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다.

1388년 6월 최영의 강요로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을 장악한 뒤 우왕을 내쫒았고, 최영은 실각하여 고봉현에 유배되었다가 합포로 옮겨졌다. 최영은 창왕 즉위 후 요동을 공격한 죄목으로 국문을 당한 뒤 다시 충주로 이배되었으며, 1388년 12월 이성계 일파의 강력한 요구로 처형당하였다.

[묘소]

최영은 사망한 뒤 아버지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최영의 묘소는 부인 문화유씨와의 합장묘이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영은 공민왕 대에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도형벽상공신이 되었고, 흥왕사의 변란을 평정한 후에는 진충분의좌명공신이 되었다. 우왕 대에는 왜구를 격퇴하여 안사공신에 녹훈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396년 태조 이성계는 봉상시에 명령하여 최영에게 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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