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761
한자 劉得信
영어공식명칭 Yoo Deuksin
이칭/별칭 홍익수(洪益洙)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원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2월 7일연표보기 - 유득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1년 - 유득신 배재학당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0년~1921년 - 유득신 군자금 모금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51년 3월연표보기 - 유득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유득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출생지 서대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학교|수학지 배재학당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신흥강습소 - 중국 만주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활동지 철원 - 강원도 철원군
활동지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철원자치위원장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유득신(劉得信)[1896~1951]은 1896년 2월 7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서 태어났다. 홍익수(洪益洙)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1911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개신교계 강사로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유득신은 1920년 동창인 이현로와 함께 전도대를 조직하여 익산·마산·대구·서울·선천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와 강연회를 통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0년 10월 목사 김태현(金泰鉉)의 집에서 김상옥(金相玉)의 권유로 암살단에 가입하였고, 김상옥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3발을 받은 뒤 일곱 차례에 걸쳐 경기도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탈취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유득신은 1921년 1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언도받고 9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득신은 출감 후 평양 남산교회당에 모인 미 감리교 연회에서 파송을 받아 목회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광복 이듬해 귀국하여 인공 치하였던 철원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 등에서도 목회 활동에 전념하면서 암암리에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반공 계몽 사업에 주력하였다. 1950년 1월 국군 북진 시 철원 지역이 일시 수복되면서 행정의 마비와 사회 혼란기를 맞자 전시대책위원회와 치안대를 구성하여 1개월 남짓 읍내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유득신은 1951년 3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유득신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 11. 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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