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911
한자 書堂
영어공식명칭 Seodang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학주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기초교육을 행하던 민간의 교육기관.

[개설]

서당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학동들로 하여금 상급학교인 향교나 서원 또는 성균관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서당에서는 습자(習字), 제술(製述), 강독(講讀)을 주로 하면서 학습을 이어갔다. 이를 통해 유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한문 해독력을 강화시켜 갔다.

강독하는 학습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통감』, 사서, 삼경, 『사기』, 당송문(唐宋文), 당율(唐律) 등이었다. 제술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부터 진행하였다. 습자는 해서(楷書)와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을 익혔다.

서당을 열 때는 개접이라 하고 학기가 끝나 닫을 때는 폐접이라 하였다. 이때는 학생들의 학습 실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시를 지어 그 우열을 가렸다. 학습하던 책이 끝나면 책거리라 하여 국수나 떡을 해서 먹었다.

[변천]

철원 지역의 서당은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학교 체제가 들어오고 교육이 한문 위주의 학문에서 서양 학문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마을마다 있던 서당은 훈장이 스스로 생계를 위해 차린 ‘훈장자영서당(訓長自營書堂)’, 부호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독서당을 연 ‘유지독영서당(有志獨營書堂)’, 마을에서 함께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던 ‘촌조합서당(村組合書堂)’으로 나뉘었다. 촌조합서당의 경우는 한 집에서 고정적으로 서당을 열지 않고 보름이나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서당을 열었다. 훈장은 마을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외부에서 모셔오는 경우도 있었다. 외부에서 모셔오면 훈장의 숙식을 제공하였다.

철원 지역의 서당은 경술국치 이후 부쩍 늘어났는데, 이는 일본식 교육을 꺼려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철원향토지』에 의하면 철원에서는 1927년 서당 수가 86개였으며, 훈장이 89명이었고, 학생 수는 1,230명인데 남학생이 920명, 여학생이 300명이었다. 1943년에는 서당 수가 15개, 훈장 수도 15명이었고, 학생 수 290명인데 남학생 240명, 여학생 50명이었다. 1927년과 1943년이 차이가 나는 것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것이다. 일제는 학생들을 소학교로 오게 하여 일본어와 역사를 가르치며 우리의 정신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 그 때문에 뜻있는 집안에서는 자녀들을 일본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 교육을 시켰다.

광복 이후 서당은 다시 부활하여 한동안 유지되다가 1970년대, 1980년대 들어 학교교육 제도가 공고히 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서당에서 한두 해 한문 학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황]

현재 철원 지역에는 전통 방식의 서당은 없어지고 대부분 유치원 교육과 학교교육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의의와 평가]

철원 지역의 서당은 역사적으로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왔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교육을 할 수 있는 민간 교육의 역할을 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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