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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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景巖齋 |
영어공식명칭 | Gyeongam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충희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50년 - 경암재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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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암재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성격 | 재실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5칸 |
소유자 |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
관리자 |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있는 이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재실.
[개설]
경암재(景巖齋)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를 추모하는 재실이다. 이주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경임(景任), 호는 태암(苔巖)이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나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과 교유하였다. 1582년에 서변동 망일봉 아래에 환성정(喚惺亭)을 지어 성리학을 강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여러 동지들과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임란 후에 연경서원의 복원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후에 서계서원(西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위치]
경암재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청석골에 있는 이주의 묘소 아래에 있다.
[변천]
경암재는 창건된 연대가 불명확하다. 1950년에 후손들이 중수하였는데, 마루 앞에 유리로 된 문이 달린 현대식으로 건립하였다.
[형태]
경암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