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053 |
---|---|
한자 | 蔡貴河 追慕碑 |
영어공식명칭 | Chaegwiha Chumobi[Goryeoguk Hojojeonseo Sijeonguigong Dauidang Chaeseonsaeng Chumobi] |
이칭/별칭 | 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추모비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28 |
시대 | 고려/고려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구본욱 |
건립 시기/일시 | 2019년 - 채귀하 추모비 건립 |
---|---|
현 소재지 | 의현사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28 |
성격 | 추모비 |
양식 | 귀부|비신|이수 |
관련 인물 | 채귀하 |
재질 | 오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84㎝[높이]|62㎝[너비]|32㎝[두께] |
소유자 | 인천채씨 문중 |
관리자 | 인천채씨 문중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에 건립된 고려 후기 문신 채귀하의 추모비
[개설]
채귀하 추모비(蔡貴河 追慕碑)[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추모비(高麗國 戶曹典書 諡貞義公 多義堂 蔡先生 追慕碑)]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다의당(多義堂) 채귀하[?~?]의 충절을 기리고자 2017년에 인천채씨 문중에서 건립한 추모비이다. 원래는 1981년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는데, 신도비의 비문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한글세대도 알 수 있게 하고자 국한문혼용으로 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채귀하는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일찍이 문과에 합격하여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킴으로써 이른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는 황해도 평산 다의현(多義峴)에 들어가 생애를 마쳤다.
[건립 경위]
채귀하의 묘소가 황해도 평산에 있어 남북 분단으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1981년 금호강변 왕옥산(王屋山)에 의현사(義峴祠)를 건립하고 의현사 광장에 채귀하 신도비[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신도비]를 세웠다. 하지만 신도비에 누락된 내용이 있고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한문으로 채귀하 추모비를 다시 세웠다.
[위치]
채귀하 추모비는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28번지인 의현사 광장에 있다
[형태]
채귀하 추모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고 오석으로 만든 비신은 높이 184㎝, 너비 62㎝, 두께 32㎝의 크기이다.
[금석문]
비 전면에는 ‘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추모비(高麗國 戶曹典書 諡貞義公 多義堂 蔡先生 追慕碑)’라는 비제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국한문혼용으로 새겨진 비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高麗)의 사직(社稷)이 다하자 선생께서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으니 내가 어찌 고향으로 돌아가리오 라고 하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키셨다. 시(詩)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으니 '동쪽 개성을 바라보니 다시 우리 땅이 아니며 서쪽 수양산을 바라보니 차마 일편단심 잊을 수 없네[東瞻開城 非復我土 西望首陽 忍忘一心]'라고 하였다. 이윽고 벽란진(碧瀾津)을 건너 황해도 평산(平山) 목단산(牧丹山) 다의현(多義峴)에 은거(隱居)하고 자호(自號)하였다. 선생께서는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맹씨(孟氏) 군사(郡事) 민보문(閔普文) 전서(典書) 이맹운(李孟芸) 전서(典書) 박심(朴諶) 정승(政丞) 구홍(具鴻)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충한(金冲漢) 예의판서(禮儀判書) 민안부(閔安富)와 함께 송도십현(松都十賢)으로 충신의 사표(師表)인 두문동 72현(杜門洞 七二賢)의 한 분이시다.”
[현황]
채귀하 추모비는 관리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