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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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翊東 |
영어공식명칭 | Jung Ikdong |
이칭/별칭 | 맹양(孟陽),겸재(謙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충희 |
출생 시기/일시 | 1735년 - 정익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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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95년 - 정익동 사망 |
출생지 | 상주 신곡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 |
수학|강학지 | 둔산동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수학|강학지 | 사수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묘소|단소 | 정익동 묘소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동래(東萊)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정익동(鄭翊東)[1735~1795]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맹양(孟陽), 호는 겸재(謙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시걸(鄭時杰)이고, 할아버지는 정은필(鄭殷弼)이다. 아버지는 정유점(鄭惟漸)이고, 어머니는 종사랑 박중윤(朴重胤)의 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첫 번째 부인 풍산유씨(豐山柳氏)와의 사이에 딸 한 명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와의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익동은 1735년(영조 11)에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공산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무렵부터 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고 있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네 번이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정익동은 송이석(宋履錫), 이만운(李萬運), 이동급(李東汲)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견문을 더욱 넓혔다. 만년에는 연계(鉛溪)와 사수(泗水)[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와 오계(梧溪)에 글방을 만들어 두고 마을의 수재와 집안의 젊은이들이 거주하며 공부하게 하였다. 시산이 지날수록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학규(學規)를 정하여 가르치고, 매달 초하루에 고과를 매겼다고 한다. 정익동은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795년(정조 19)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익동이 편찬한 책으로는 『역대인물지(歷代人物志)』, 『동방문선(東方文選)』이 있다. 정익동의 문집으로는 『겸재선생문집(謙齋先生文集)』이 있는데, 1914년에 손자 정숭진(鄭嵩鎭)이 간행하였다.
[묘소]
정익동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의 나불산(蘿茀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