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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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琴西齋 |
영어공식명칭 | Geumseo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51길 45-17[서변동 88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호 |
현 소재지 | 금서재 - 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51길 45-17[서변동 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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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재실 |
양식 | 팔작지붕 목조 와가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
관리자 |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이석규를 추모하는 재실.
[개설]
금서재(琴西齋)는 개항기의 학자 이석규(李錫奎)[1816~1892]를 기리기 위하여 지역 유림과 인천이씨(仁川李氏) 공도공파 문중이 힘을 합쳐 건립한 추모 재실이다. 이석규의 자는 치옥(穉玉)이고, 호는 금서재(琴西齋)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학문에도 힘을 써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심경석의(心經釋疑)』와 『근사록(近思錄)』에 조예가 깊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철회를 요구하는 활동을 펼쳤고,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876년(고종 13)에는 흑산도로 유배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방면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한일협상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석규의 저술로는 유고를 모은 『금서유고(琴西遺稿)』가 전한다.
[위치]
금서재는 북구 서변동 881에 있다.
[형태]
금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목조 기와집이다. 가운데 1칸 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 1칸 방, 서쪽에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금서재는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9일 금서재에서 시제(時祭)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