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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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答李以直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Lee-yijik |
이칭/별칭 | 「이이직에게 답하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답이이직」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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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답이이직」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에 「답이이직」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사수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배경 지역 |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
성격 | 서간류|서 |
작가 | 정구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이서와 나눈 문답과 편지.
[개설]
「답이이직(答李以直)」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서(李𥳕)[1566~1651]의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이직(以直)이며, 호는 동호(東湖) 또는 동호야로(東湖野老)이다. 시호는 덕요(德耀)이다. 아버지는 이홍우(李弘宇)이고, 어머니는 진양강씨(晉陽姜氏) 강개(姜漑)의 딸이다. 정구의 문인이다. 정구의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중편하였고, 『한강집(寒岡集)』 간행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동호집(東湖集)』이 있다. 2001년 발행한 『국역 한강집』에서는 「답이이직」의 제목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이이직에게 답하다」라고 표기하였다.
[구성]
「답이이직」은 『한강집』에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세 편은 문답 형식이고 세 편은 편지이다.
[내용]
「답이이직」 중 문답 형식으로 된 작품이 세 작품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장자(長子)가 어른이 되었으나 장가들기 전에 죽었을 경우 신주를 사당에 들여야 되는지, 제사하는 장소를 따로 설치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서의 질문에 정구는 장가들기 전에 죽어서 성인(成人)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례를 적용하여 신주를 사당 안에 함께 두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2. 부모의 대상(大祥) 때 발생할 수 있는 상황과 신주를 고쳐 쓰는 일, 축문에서의 정확한 호칭 등에 대한 문답이다.
3. 성주의 이조년(李兆年)과 이인복(李仁復)을 향사하기 위하여 세운 충현사(忠賢祠)에 위패를 봉안하는 절차에 대한 문답이다.
「답이이직」 중 편지 형식으로 된 작품이 세 작품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선비의 기풍이 쇠퇴한 정도가 심하여 허송세월하며 잡무에 빠져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쇠퇴한 문풍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근사록』 통독(通讀)을 제안하고 있다.
2. 정구가 이서를 도유사(都有司)로 삼고, 사천(泗川) 가에 새로 마련한 서재에 모여 『오선생예설』을 간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3. 서원 원장 자리를 내놓으려는 이서에 대한 정구의 엄중한 꾸짖음이 담긴 편지이다. 별지(別紙)가 첨부되어 있다.
[특징]
「답이이직」 중 엄중하게 꾸짖는 내용의 편지에 별지가 붙어 있는데, 정구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며 이서에게 권하고 있다. 이서를 권면하기 위하여 정구가 가설한 이야기이다. 평소 문인을 아끼던 정구의 성정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답이이직」은 통독을 통하여 대구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정구의 노력과 예학에 정통한 정구의 학문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