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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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畵巖暮春 |
영어공식명칭 | A Late Spring Of Hwa-arm |
이칭/별칭 | 「화암의 늦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50년 - 「화암모춘」 저자 채귀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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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05년 - 「화암모춘」 저자 채귀해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99년 - 『치헌유고』에 「화암모춘」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화암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성격 | 한시|칠언율시 |
작가 | 채귀해 |
[정의]
개항기의 유학자인 채귀해가 늦봄에 대구의 연경서원 유허지를 둘러보고 지은 한시.
[개설]
「화암모춘(畵巖暮春)」의 저자 채귀해(蔡龜海)[1850~1905]의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낙응(洛應)이며, 호는 치헌(痴軒)이다. 아버지는 채석범(蔡錫範)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택승(曺宅承)의 딸이다. 집안이 대대로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하였다. 최효술(崔孝述)[1786~1870]에게 학문을 익혔다. 1878년 훼철된 서원을 복설하여 줄 것을 청하는 소를 올릴 때 참여하여 서울에서 5개월 가량을 머물렀다. 저서로 『치헌유고(痴軒遺稿)』가 있다.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광역시에 최초로 지어진 서원이며, 이황(李滉)[1501~1570]·정구(鄭逑)[1543~1620]·정경세(鄭經世)[1563~1633] 세 사람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하였던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북구 연경동의 사이에 있다.
화암산(畵巖山)은 해발고도 110m의 산이며, 지도상에 정식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화암(畵巖)이라는 하식애(河蝕崖)가 있는 산이라 하여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화암모춘」의 이칭은 「화암의 늦봄」이다.
[구성]
「화암모춘」은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내용]
백장층암활화성(百丈層巖活畵成)[백 길 높은 바위 살아 있는 그림 이루고]
화중풍경십분명(畵中風景十分明)[화암 가운데 자연 경치는 더욱 밝구나]
매옹위업금유적(梅翁偉業今遺跡)[매화 어른의 위업 지금까지 자취 남아 있으니]
퇴노당년조석명(退老當年肇錫名)[퇴계 선생께서 그해 처음으로 이름 내리셨지]
고벽풍마태연몰(古壁風磨苔椽沒)[옛 벽은 바람에 갈리어 서까래도 무너졌고]
황허맥수야인경(荒墟麥秀野人耕)[황량한 터에는 보리 빼어나 촌부들 밭 가네]
승청강욕투한거(乘晴强欲偷閒去)[화창한 날씨에 억지로 한가함 밀쳐 내려는데]
구로전정유숙맹(鷗鷺前汀有宿盟)[물가 앞 해오라기 옛 맹세 떠올리게 하네]
[특징]
「화암모춘」은 ‘경(庚)’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8행의 ‘구로(鷗鷺)’는 ‘갈매기’와 ‘백로’를 가리키는 것이다. ‘구로와의 맹세[鷗鷺盟]’란 그들을 벗 삼아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고 강호에 은거하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원나라 오징(吳澄)[1249~1333]의 「용운수매월옹(用韻酬梅月翁)」에 “호해의 오랜 맹약은 구로사요[湖海舊盟鷗鷺社]”라는 구절이 보인다. 특징적인 시각적 요소를 시 구절마다 배치시켜 화암의 아름다움과 연경서원 터의 황량함, 그리고 화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암모춘」은 화암의 경치와 연경서원의 유허지를 바라보며 쓸쓸한 심경을 읊은 작품이다. 채귀해는 여전히 그림과 같이 수려한 화암의 풍광과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흔적만 남은 연경서원의 유허지를 대비시켜 쓸쓸함을 배가시켰다. 서원 복설을 주장하며 서울에서 5개월간 머물 정도로 채귀해는 연경서원 복설에 힘썼다. 「화암모춘」의 창작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하부 4행의 정서로 보았을 때, 서원 복설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와 화암을 돌아보며 지은 시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