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B02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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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갑표 |
[그릇골이 동곡으로 불리다]
동곡이란 지명은 예전에 도요지가 있던 까닭에 그릇골이라 불리던 것이 구릿골이 되었다가,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구리 동(銅), 골 곡(谷)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동곡의 옛 지명인 구릿골만 보아도 마을 어딘가에 도요지가 있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조선 자기가 동곡마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청자 도요지가 주로 해안가에 있던 것에 비해 조선 백자 도요지는 주로 내륙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백자 도요지의 요건이 그릇을 굽는 원료를 공급하기 편리해야 하고 땔나무와 유약의 원료가 풍부해야 하며 소금의 공급이 원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 조건에 합당했던 까닭일까?
[동곡마을 도요지 현황]
1997년 전라북도 지역의 도요지[가마터]에 대한 방대한 지표 조사 보고서가 『전북의 조선시대 도요지』란 이름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간되었다. 전라북도 지역 13개 시군에 산재한 2백 개소의 도요지를 조사한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조사 결과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157개의 가마터, 곧 도자기 요지 113개소, 옹기 요지 45개소, 기타 토지요지나 와요지 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동곡마을에서도 3곳의 도요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조선 백자의 흔적이었다.
동곡마을 1호 도요지 는 금산면 청도리 684번지 일대로, 마을에서 청도원으로 가는 산길로 약 200m 오르면 축사가 있는데, 바로 그 옆의 산이다.
현재 상태는 축사 건축 당시에 산을 깎으면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깎인 산기슭 단면에는 많은 백자편이 포개어진 상태로 퇴적되어 있다.
1호 요지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의 분청, 16~17세기 백자와 요도구, 원통형 도지미[직경 9~12cm, 고 3~4.6cm], 자연석 도지미[도짐이, 가마에서 도기를 구울 때 도기를 놓는 받침]가 출토되었다.
2호 도요지는 금산면 청도리 산256번지로 1호 요지에서 청도원 쪽으로 약 200m 올라가서 만나는 갈림길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10m 되는 지점이다.
현재 상태는 퇴적층이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대량의 백자편이 더미를 이루고 있다. 출토 유물은 18~19세기 백자와 함께 철회백자가 출토되었으며, 납작하고 경사진 원형 도지미가 출토되었다.
3호 도요지는 금산면 청도리 산341번지로, 동곡약방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밭에서 골짜기를 따라 400m 정도 들어가면 골짜기 옆으로 비교적 완만한 사면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사면 일대에 자기편 무더기들이 비교적 넓게 산재하고 있다.
그 주변으로 원형의 도지미와 소토, 여러 자기편이 포개어진 채 같이 확인되어 도요지의 존재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릇이 담고 있는 의미]
사람들에게 그릇이란 무엇인가? 도자기란 ‘도기(陶器)[pottery]’와 ‘자기(瓷器)[porcelain]’를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질그릇 혹은 옹기라고도 불리는 도기는 도토[흔히 찰흙이라 불리는 붉은색의 진흙]라는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청자·백자·분청사기 등과 같은 자기는 자토[돌가루로 되어 있다]라는 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본적으로 흙이 다르다.
도자기는 우리 문화유산의 꽃이며, 실용적인 기능 외에도 장식적이며 예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도요지가 발견된 마을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살필 수 있다. 즉, 도자기의 발달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 신념 및 예술 등과 연결된다. 도자기는 사람들의 삶과 꿈, 아름다움을 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특정 개인의 제한된 공간이 아닌 마을 전체의 공간이었을 가마터를 복원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