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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주민 소개 작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81
한자 六二五戰爭住民疏開作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1년 05월연표보기 - 철원 주민 소개 작전 시작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1년 06월연표보기 - 철원 주민 소개 작전 종료

[정의]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 철원 지역 주민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강제 이주시킨 작전.

[개설]

6·25전쟁 당시 철원 주민들의 이동 경로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첫 번째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월남한 부류로 당시 전체 철원 주민의 5% 미만이다. 두 번째가 1950년 가을 인민군들이 퇴각 할 때 북으로 올라간 부류이다. 자습당원이나 열성당원들은 이미 인민군의 전세를 알고 자진 월북하였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세포위원장과 인민위원장의 지시와 인민군의 강제 압송으로 북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특히 월북자가 많았던 부락은 이길리, 내대리, 독검리, 김화 근북면, 관우리, 군탄리 등이었는데 철원군 전체 주민의 70% 이상이 북으로 갔다. 세 번째가 1951년 1·4후퇴 때와 봄에 미군들에 의한 주민 소개 작전 때 후방으로 강제 이주된 부류이다. 이들 대부분은 열성분자와 인민군의 강제 월북을 피해 숨어 있던 사람들이며, 전체 철원 주민들의 20% 내외이다.

소개(疏開)는 ‘주로 적의 포격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고자 전투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넓히거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을 뜻하는 군사용어이다.

[역사적 배경]

6·25전쟁이 발발할 무렵 철원 지역은 북한 땅이었기에 입대 적령기 청년들은 대부분 인민군에 끌려가게 되었다. 인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청년들은 6개월 이상 산이나 동굴로 피신하여 미군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으며, 미군이 진주하자 동네 치안대가 되거나 미 군속이 되었다.

[경과]

1950년 11월 중공군이 개입하여 남하하자 미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안전지대인 포천 지역으로 소개(疏開)하였고, 철원 피난민 1차 집결지는 경기도 포천 문하리[지금의 양문 근처]였고 거기에서 다시 2차로 광나루나 천호동으로 소개되었다. 포천 문하리에서는 장정들을 차출하여 전방에서 전투 중인 미군이나 국군을 지원하는 노무부대를 편성하였다. 철원 출신 남자들은 딱히 갈 곳이 없어 노무대에 지원하였다. 이때 활동한 노무대원들은 고향 근처에서 미군의 전쟁 수행을 도와 인민군 남하를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결과]

남쪽으로 피난한 주민들 중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토박이들은 15% 내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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