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008
한자 傳統
영어공식명칭 Traditional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창석

[정의]

강원도 철원군의 전통 시대 개관.

[개설]

철원은 한반도 중부 지역 문화의 교차로였으며 태봉의 도읍지로서 고려, 조선 시기에도 지방통치와 군사 거점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문화의 교차로]

철원은 고대로부터 전략적 요충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현재의 드넓은 철원평야는 사실 일제 강점기에 저수지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어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다음에 조성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밥맛 좋은 쌀이 생산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철원은 화산 분화로 인한 화산재의 퇴적으로 형성된 용암 지형이어서 토양이 비옥하였다. 밭농사에도 유리한 환경인 것이다. 고려 후기인 13세기 전까지도 한반도에서 밭농사의 비중이 컸고 벼농사라고 하더라도 마른 논에 산도[山稻] 종자를 뿌리는 건경직파 작법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철원 지역에 수전이 부족하였다고 하더라도 드넓은 들판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하여 잡곡을 재배하고 산도를 이용한 벼농사도 짓는 농업 생산지대였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마주치는 경계 지점에 철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철원을 차지하면 철원을 교두보 삼아 다른 두 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철원은 군사적으로 중시되었고 삼국 간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철원은 한반도 중부의 내륙에 있기에 추가령구조곡과 임진강 상류, 한탄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어 교통로상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전략적 가치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적이 많았지만 철원은 사방의 문화가 유통되고 복합화하는 교차로였다. 재지 세력인 영서예의 토착 문화는 고조선의 철기문화, 낙랑군의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 백제의 투기와 마구, 고구려의 군사제도, 신라의 행정 체계 등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자신의 고유 문화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경질민무늬토기, 여자형·철자형 주거지, 적석문구묘[돌무지무덤] 등 영서예의 문화 요소를 주변으로 확산시켰다.

[태봉의 도읍지, 고려 정치, 문화의 발상지]

철기 시대 이래의 전략적 자원과 다양한 문화 요소를 기반으로 하여 마침내 태봉의 도읍지로 선정되었다. 신라의 왕경인 경주 출신이었던 궁예가 멀리 떨어진 철원에 도읍을 정한 배경에는 철원이 가진 풍부한 경제력과 교통로상의 이점, 그리고 한반도의 중심으로서 사방을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적 효용성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적 자원 또한 간과할 수 없는데, 도피안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피안사는 전각은 모두 사라졌으나 석탑과 철불이 남아 있어 신라 하대에 철원의 유력한 지방세력이 향도를 조직하고 1,500여 명이나 되는 불교 신자의 염원을 모아 불사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63호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당시 지방사회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으로 왕경의 교종 중심 전통 불교를 비판하던 새로운 불교의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보물 제223호인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鐵原到彼岸寺三層石塔)의 기단부는 특이하게 평면 8각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불교의 전통과 맥이 닿는다.

미륵하생 신앙을 신봉하던 궁예는 철원의 이러한 불교문화를 주목했을 것이다. 태봉의 정치제도와 주요한 중앙 관부는 철원에서 시행되고 설치되었다. 정치를 평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이었던 광평성, 행정을 총괄하고 인사권을 가진 내봉성, 그리고 병권을 장악하여 군사지휘권을 행사한 순군부는 모두 궁예가 창설한 태봉의 관부였다. 그런데 이 제도가 고려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태조로부터 경종 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의 최고 관부로서 기능하였다. 태조 왕건궁예의 뜻을 따라 신라의 골품제를 폐지하였고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태봉의 원래 국호인 ‘후고구려’를 이어 고려라고 국호를 정하였고 궁예를 쫓아냈음에도 궁예를 ‘나라의 전 주인’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철원은 태봉의 도읍일 뿐 아니라 고려 정치와 문화의 발상지로서 이후 고려 초 역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 중부 내륙의 핵]

고려 성종 대 이후 철원의 위상은 하락하였다. 성종은 전국에 12목을 두고 처음으로 상주하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철원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철원은 동주라고 불렸으며 1018년(현종 9) 지주사가 두어지고 삭녕, 평강, 장주, 승령, 이천, 안협, 동음현을 소속시켰다. 그리고 5도 양계제 아래서는 동주가 교주도에 속했다. 그러나 군사적, 전략적 중요성은 여전하여 고종 대 몽골 침략 시 주 공략 대상의 하나가 되었고, 두만강 유역에 있던 포선만노의 동여진 세력 역시 동주를 침공하였다. 교통로상으로 중시되어 전국의 주요 간선로인 22역도 중 도원도에 동주의 풍천역 등 21개 역이 속하였다. 이윽고 충선왕 때 동주가 지금의 지명인 철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태종 대 도호부가 되고 시위군이 설치되는 등 한반도 중부의 지방통치와 지역 방어에서 핵심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 지역 출신인 장수 김응하는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의 휘하에서 출정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명종 때에 활동한 임꺽정 역시 철원을 무대로 하여 이름을 떨쳤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의 백정 출신으로서 천민이 차별받는 질서를 거부하고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임꺽정고석정 주변에 산성을 쌓아 거점을 마련한 다음 부정하게 축재한 양반가를 약탈하고 한양으로 들어가는 세곡을 가로채 빈민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철원이 군사의 요충지이고 중부 내륙의 교통로상 핵심이었기 때문에 임꺽정이 철원을 택한 것이다. 선조 대에 중건된 철원향교가 지역 인재의 유교 교육과 선유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였고, 구은사, 충열사, 포충사 등 사당이 제향 활동을 중심으로 유교문화를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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