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05
한자 朝鮮 時代
영어공식명칭 Choseonsida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영규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지방행정 조직은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관찰사(觀察使)[종2품]를 두고, 그 밑에 유수부(留守府) 1개, 부(府) 6개, 대도호부(大都護府) 5개, 목(牧) 20개, 도호부(都護府) 74개, 군(郡) 73개, 현(縣) 154개를 두었다. 이에 따라 철원은 도호부가 되었고 관원으로는 부사(府使)[종3품]와 교수(敎授)[종6품] 각 1명이 있었다. 1434년(세종 16)에 이르러 철원은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당시 철원의 호수는 351호이고 인구는 770명이었다. 한전(旱田)과 수전(水田)의 비율은 4:1이며, 간전(墾田)이 모두 4,343결(結)이었다. 1760년(영조 37) 간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철원군은 9개 면에 81개 리, 인구는 3,646호에 1만 5610명이었다.

국방 및 운송 관계를 보면 각 지역에는 주요 군사 거점인 진(鎭)을 중심으로 인접한 몇 개의 군현이 유방군(留防軍)을 내어 전란에 대비케 하였는데 강원도에서는 강릉과 간성에 진을 두었으나 따로 유방군이 없이 유사시에 중앙에 번상하는 시위패(侍衛牌)로 충당하도록 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철원군에 시위군이 62명 있었다.

한편 지방군제는 1457년(세조 3) 진관(鎭管) 체제로 개편되어 강원도에는 원주·회양·강릉에 진관을 두었고 철원은 회양 진관에 소속되었다. 1684년(숙종 10)의 기록에 의하면 철원 영장(營將)이 춘천부와 회양 진영을 통솔하였다. 철원 지역 봉수로는 소이산(所伊山)과 적골산(適骨山)이 있었는데,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주봉(主峯)의 연결선에 위치하였다. 교통의 요충지인 철원에는 용담역(龍潭驛)과 풍전역(豊田驛)이 있었고 세곡(稅穀)은 경창(京倉)에 직접 납부하도록 하였다.

[주요 역사적 사건]

조선 시대 강원도 철원군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은 크게 3건이 있다. 첫째, 세종대왕이 재위 기간 총 19회에 거쳐 93일 간이나 철원에서 강무(講武)행차를 하였다. 『세종실록』 1421년(세종 3) 4월 19일자에는 “철원(鐵原)에 도착하여 고석정(高石亭) 아래에서 몰이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포획한 짐승은 종묘와 문소전(文昭殿)·광효전(廣孝殿)·공정대왕(恭靖大王)의 혼전(魂殿)에 바치고, 또 의정부와 육조에 나누어 주었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강무는 단순히 군사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무에서 잡은 짐승을 종묘(宗廟)의 제사에 바침으로써 왕실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 철원 출신의 김응하(金應河)가 명(明)나라 구원군으로 후금(後金)과 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여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고 명으로부터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여졌다. 김응하는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안동김씨인 아버지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에서는 건주위(建州衛)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였다. 김응하는 이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에 들어갔다. 1619년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3월 명나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車嶺)에서 패전하여 자결하자 김응하는 3,000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6만 명의 적군과 대전하게 되었는데 고군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셋째, 병자호란 당시 평안도 관찰사인 홍명구(洪命耈)와 병마절도사인 유림(柳琳)이 청나라 군대에 맞서 김화 백전(柏田)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인조 14) 12월 8일 청(淸)이 13만 병력으로 조선을 무력 침공한 전쟁이다. 김화 백전 전투는 병자호란 종반부인 1637년 1월 28일 남한산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남진(南進)하던 평안도 근왕군과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대부분 지방 근왕군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대패하거나 도주하였지만 홍명구 군 2,000명과 유림 군 3,000명 등 5,000명의 평안도 근왕군은 김화에서 4차례에 걸친 청과의 전투에서 약 3,000명의 청군 희생자를 내고 승리하였다. 한편 김화 백전 전투에서 홍명구는 전사하였고, 유림 장군은 승리한 다음 날 군대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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