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14
한자 金化栢田戰鬪
영어공식명칭 Gimhwa Baekjeon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37년 01월 28일연표보기 - 김화 백전 전투 발발
발단 시기/일시 1636년 - 병자호란 발생
발생|시작 장소 김화 백전 전투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일대지도보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홍명구|유림

[정의]

조선 후기 발생한 병자호란 당시 현재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일대에서 벌어졌던 전투.

[개설]

김화 백전 전투(金化栢田戰鬪)는 병자호란 종반부인 1637년 1월 28일 남한산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남진(南進)하던 평안도 근왕군(勤王軍)과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淸軍)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인조 14) 12월 8일 청이 13만 병력으로 조선을 무력 침공한 전쟁이다. 병자호란은 청의 일방적인 제압으로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포기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삼밭나루]에서 치욕적으로 군신(君臣) 관계 내용이 주가 된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체결하며 종식되었다.

[역사적 배경]

병자호란의 개전 초부터 다수의 기병(騎兵)을 보유한 청군의 빠른 진격 속도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남한산성에 들어가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함락, 주전·주화파의 대립, 장기전으로 인한 군량 부족 등으로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국가 위란의 기간 중에 전국 각 도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경과]

평안도관찰사 홍명구는 왕의 명령을 받고 2,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홍명구군 2,000명과 평안도병마절도사 유림군 3,000명 등 총 5,000명의 평안도 근왕군은 김화에서 4차례에 걸친 청과의 전투에서 약 3,000명의 청군 희생자를 내고 승리하였다. 한편 김화 백전 전투(金化栢田戰鬪)에서 홍명구는 전사하였고, 유림은 승리한 후 다음 날 군대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유림이 이끄는 근왕군이 김화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일어난 전투임에도 전투 현장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목책을 겹겹이 쌓고 철저히 준비하는 한편 치밀한 전략으로 승리하였다.

[결과]

홍명구김화 백전 전투에서 국가와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공이 인정되어 병자호란 직후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화 주민들은 1645년(인조 23) 홍명구 충렬비를 세웠고, 1650년 사당을 세웠으며, 1652년 효종이 ‘충렬사(忠烈祠)’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賜額) 사당이 되었다. 유림 장군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전투가 끝난 지 159년 뒤인 1796년(정조 20)의 일이다. 김화 주민들은 1644년(인조 22)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향교골]에 유림장군 대첩비를 세웠다. 유림장군 대첩비는 현재 충렬사 앞으로 옮겨져 홍명구 충렬비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화 백전 전투는 용인 광교산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당시 2대 승첩(勝捷)인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2012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친 철원군 학술대회에서 집중 재조명되었고 향후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 중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