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유종 침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01
한자 契丹遺種 侵入
영어공식명칭 Invasion of Geor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16년 8월 14일[음력, 양력 1216년 9월 27일]연표보기 - 거란 고려 침략
종결 시기/일시 1219년 1월 14일[음력, 양력 1219년 1월 31일] - 여몽연합군이 거란군 격퇴
발단 시기/일시 1216년 - 몽골군이 대요수국 공격
전개 시기/일시 1217년 5월 4일[음력, 양력 1217년 6월 9일]연표보기 - 거란군의 동주 함락
발생|시작 장소 영삭진 - 평안북도 태천군
종결 장소 강동성 - 평안남도 강동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몽골|거란|고려

[정의]

1217년 강원도 철원군 일대를 거란의 유종이 침략한 사건.

[개설]

1217년 몽골군에게 밀려 남하하던 거란유종(契丹遺種)이 강원도 철원군 일대를 침략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3세기 초 부족 통합에 성공한 몽골이 본격적인 동북아시아 원정에 돌입함에 따라 고려를 포함한 국제 정세는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서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금나라의 통제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 거란족 수장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반기를 들어 요왕(遼王)을 자칭하였으며, 야율유가의 진압을 위하여 금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포선만노(浦鮮萬奴)는 거란전에서 패배한 후 일부 여진족을 규합하여 대진(大眞), 이른바 동진(東眞)을 건국하였다. 이윽고 금나라로부터 자립한 거란족과 동진이 몽골군의 압박에 밀려 남하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고려는 두 국가와 물리적 충돌을 경험하게 되었다.

거란족은 지도부의 내분으로 수장 아율유가가 몽고에 투항하자, 1216년 야율사포(耶律斯布)의 지휘 하에 대요수국(大遼收國)을 건국하고 고려 경내에 수차례 침입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16년 8월[음] 거란 유종(遺種)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장수 아얼(鵝兒)과 걸노(乞奴)를 보내어 영삭진(寧朔鎭)과 정융진(定戎鎭)을 노략질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후 1219년까지 거란의 유종은 함경도·평안도 일대의 주요 거점들을 함락시키며 고려를 위협하였고, 수도 개경에 첩자를 보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경과]

1216년 8월[음] 영삭진 전투를 시작으로 거란유종은 남하를 계속하였다. 고려 조정은 방어에 실패한 지휘관들을 문책하면서 총력을 기울여 방어하였으나 저지하지 못하였고, 거란유종은 1217년 4월[음] 황해도·강원도·경기도와 연접한 금교역(金郊驛) 일대까지 진군하였다. 이에 고려는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삼아 5군을 정비하고 대비하였다. 하지만 거란유종은 1217년 5월 4일[음] 현 철원군 일대에 해당하는 동주(東州)를 함락시킴으로써 한반도 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결과]

동주의 함락으로 고려 조정은 거란유종이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고종(高宗)은 무신집정 최충헌(崔忠獻)의 제안을 수용하여 중군병마사 오응부를 파직하고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 최원세(崔元世)로 대체하였다. 나아가 상장군(上將軍) 김취려(金就礪)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삼아 군대를 재정비하였다.

[의의와 평가]

거란유종과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는 비로소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몽골과 조우하게 되었다. 1219년 고려군은 거란족을 쫓아 고려 경내까지 진입한 몽골군과 접선하였다. 이해관계가 맞은 고려와 몽골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을 격퇴하고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강동성 전투를 계기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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