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27
한자 鐵原製絲工場
영어공식명칭 Cheorwon Silk Manufacturing Factory
이칭/별칭 종연방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1933년연표보기 - 종연방적주식회사 철원공장 준공
최초 설립지 철원제사공장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있던 누에고치를 수집하여 명주실을 생산하던 공장.

[개설]

삼정(三井)재벌[현 미쓰이그룹]의 계열사인 종연방적(鍾淵紡績)주식회사가 세운 철원제사공장은 철원, 평강, 김화, 연천, 포천, 금성, 화천 등지에서 수집한 누에고치로 견사(絹絲)를 생산하여 미국에 수출하였던 제사공장이다.

[건립 경위]

일제 강점기 일본의 기업들은 우리나라 각 지방에 기업체를 세우고 수탈의 무대로 삼았다. 1887년 설립하여 일본 방적업 발전을 주도하였던 종연방적주식회사는 1925년 11월에 동대문공장인 경성제사공장을, 1930년에는 여성 노동자만 4,000명에 달하는 광주제사공장을 건설하였다. 이외에도 영등포공장, 대구공장, 평양공장 등 각 지역에 지속적으로 공장을 확충하였다. 철원제사공장은 1933년 12월에 건설되었는데, 총공사비 20여 만 원이 투입된 공장에는 공장 이외에 창고, 기숙사 등이 있는 매우 큰 규모였다.

[변천]

철원제사공장은 강원도 내 유일한 견사 공장으로 원래 명칭은 종연방적주식회사 철원공장이었다. 철원제사공장의 부지는 경마 20두가 있었던 경마장 터였다. 1933년 일제는 경마장을 폐쇄하고 부지 1만 413㎡에 목조건물로 제사공장을 세웠다. 1945년 해방 이후 공산 치하에서는 철원군 인민위원회가 관리 운영하였으며, 6·25전쟁 때 폭격으로 공장 건물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구성]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저렴한 임금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여 80만 명의 농민으로 하여금 9만 정보에 이르는 뽕밭을 재배하게 하였다. 철원군 최고 전성기였던 1937년에 일제가 발간한 『철원읍지』에 따르면 1936년 말 철원제사공장의 종업원은 550여 명이었고, 연간 생산량은 5만 953㎏, 연간 생산액은 47만 4500원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공원이 1,000여 명에 달하는 견사공장으로 번창하였다. 철원제사공장에 동원된 철원 주민들은 매우 낮은 임금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는 등 극심한 착취에 시달렸다. 제사공장에 근무하던 공원들은 성인이 아니라 13세에서 18세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소녀들은 하루 12시간의 강제노동을 강요당하면서도 겨우 10전~15전의 임금을 받았다.

[현황]

6·25전쟁 때 폭격으로 공장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정문 한쪽 기둥만 남아 있는 채 지뢰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철원제사공장은 철원군 DMZ평화관광 코스에 있는 근대 문화유적 중 한 곳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일제 강점기 철원군의 경제적 번성 정도를 가늠할 잣대이면서 일제가 얼마나 잔혹하게 조선의 어린 소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는지 엿볼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제사공장은 소실되었지만 철원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장소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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