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30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규

[정의]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

[개항기]

1895년(고종 32) 부제(府制)가 실시됨에 따라 춘천부 철원군이었다가 다시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도제로 환원되면서 강원도 철원군이 되어 동별면, 갈말면, 서변면, 신서면, 송내면, 관인면, 북면, 어은동면, 묘장면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개항기 철원에서는 의병 부대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허위(許蔿)는 경상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柳麟錫) 등 여러 지사들과 만나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새로이 보국을 결의하고 9월 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 부대와 서로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10월 허위 부대가 철원 지역에서 의병 세력을 떨치게 되자 10월 15일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가 철원에 출동하여 10월 16일 아침 심원사(深源寺)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의병 부대를 추격하였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심원사에서 대기 중이던 허위 부대는 금성수비대가 10월 17일 나타나자 또 한 차례 타격을 가하고 재빨리 심원사를 탈출하여 연천(漣川)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심원사까지 의병을 추격하여 소득 없이 습격만 당한 금성수비대는 심원사가 철원 지역 의병 활동의 거점이 된다 하여 심원사를 불 지르고 금성으로 귀대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 3월 1일 군면 통폐합에 따라 경기도 삭령군의 내문면, 인목면, 마장면 등 3개 면이 철원군에 병합되어 서변면, 동송면, 갈말면, 어운면, 북면, 신서면, 묘장면, 내문면, 인목면, 마장면의 10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 4월 1일 부령 제103호로 서변면[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철원군은 일제 강점기 때 가장 번성하였다. 식민지 통치 아래 일제의 착취와 수탈로 한반도 전역의 백성이 신음하였는데, 철원 주민들도 농산물은 물론 가마니와 송탄유 공출로 힘든 나날을 보내었다. 일제 강점기 철원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사건은 경원선 부설과 금강산선 건설 그리고 철원중앙수리조합 설립에 이은 철원평야 개발이었다. 한반도 중심부 교통의 요충지였던 철원군은 경원선 부설로 자연스럽게 사람과 물산이 집중하게 되었고 단기간에 상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주민들의 민도(民度)가 높아 강원도에서 3·1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1926년에는 철원번영회가 강원도청 철원 이전 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발행된 『읍세일반』에는 당시 철원군청 소재지 철원읍 규모와 주민 생활, 물가, 인건비, 공무원 직급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37년 철원읍은 원산으로 들어가는 철도와 금강산으로 가는 전철이 놓였고 상수도·전화·도립병원 등이 있었다. 벼농사 외에도 양잠농이 많아 종연방직에는 여직공만 500명이 근무하였다고 한다. 교통은 경성[101㎞]까지 1시간 59분, 원산[125㎞]까지 기차로 3시간 10분, 춘천읍은 화천을 경유하여 자동차로 3시간, 금강산[116㎞]은 전철로 4시간이 걸렸다. 논은 334만 6000평[1106만 1157㎡], 밭은 274만 평[905만 7851.24㎡]이 있었는데, 논 상(上) 등급의 평당 가격은 15원이었고, 쌀 값은 큰 되가 32전이었다. 인구는 한국인 1만 8425명, 일본인 1,204명, 중국인 63명, 외국인 1명 등 모두 1만 9693명이었으며, 전체의 37%가 농업 인구였다. 학교는 보통학교 1개교, 중학교 2개교, 유치원 2개교 등 5개교가 있었고 종교는 감리교 교인이 495명으로 가장 많았고 금광교(金光敎) 교인도 30명이 있었다.

물가는 막걸리 1되에 60전, 두부 1모에 6전, 맥주 1병에 38전이었다. 접객업소는 여관 34개, 요리옥 10개, 음식점 51개, 이발관 8개, 목욕탕 3개가 있었고, 공장은 2개의 제사공장을 비롯하여 도정, 주조, 철공 등 27개가 있었는데 생사(生絲)는 1년 동안 5만 93㎏[47만 4500원]을 생산하였다. 4개 금융기관 중 식산은행 철원지점의 예금고는 1788만 1720원, 대출금은 1204만 7865원이었다. 전화가입자 수는 150세대였으며 상수도 급수 인구 2,500명, 자동차 15대, 오토바이 4대, 자전거 793대, 인력거 19대, 손수레 76대, 우마차 45대로 나타났다. 의료진은 의사 9명, 치과의 2명, 약사 5명, 산파 3명, 의생 5명이 있었다. 읍 재정은 14만 8845원으로 교부금은 1.3%인 1896원이었다. 읍 직원은 40명이 있었고, 관내 기관은 군청, 법원, 세무서, 우체국, 철원역 등 34개 기관이 있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