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소작민 집단 이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42
한자 全國小作民集團移住
이칭/별칭 집단 사민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전국 소작농 철원 집단 이주
발생|시작 장소 전국 소작농 집단 이주 - 강원도 철원군

[정의]

1924년 조선총독부가 철원평야 개발을 위해 전국에서 소작민들을 이주시킨 사건.

[개설]

조선중앙수리조합이 결성된 후 저수지를 만들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1924년 조선총독부는 철원평야 개척과 소작을 담당할 노동자들을 전국으로부터 대거 모집하여 이주시켰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500호의 조선인 노동자를 철원으로 대거 이주시켜 조선중앙수리조합이 경영하는 개답(開沓) 작업에 종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역사적 배경]

불이철원농장에서는 철원군 일대 8,800정보[8727만 2727.3㎡]라는 광대한 토지를 획득하였고, 토지를 경작할 소작민이 필요하였다. 불이철원농장의 관점에서는 일본서 이민을 데려오는 것보다 조선 안에서 임금이 낮은 조선 농민을 모집하는 것이 나을 수밖에 없었다. 불이철원농장에서는 개답조합을 조직하고 1924년 정월부터 조선 내에 선전하여 이민을 모집하였다.

[경과]

불이흥업회사에서는 이민을 모집하는 데 있어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이민 모집을 소작문제가 자주 일어나는 전라도에서 주로 모집하려 하였다. 불이흥업회사에서는 전라도 농민의 성질이 불량하다 하여 오히려 전라도만 제외하고 전국의 각 도지사에게 이민 모집 권유를 의뢰하였다. 1924년 4월 10일 선발진 약 500호가 철원에 영주할 목적으로 이주하고 나머지 1,000호도 곧 차질 없이 진행하여 조선 내 노동자 생활을 안정케 하였다.

[결과]

각 도지사의 권유에 의하여 각 군 면장들이 면내에서 모집하여 당시 철원농장으로 이사시킨 이민자 수는 다음과 같다. 함북 120호 520명, 함남 25호 150명, 황해 70호 350명, 평남 25호 100명, 강원 5호 35명, 경기 5호 20명, 충남 5호 20명, 경남 3호 10명, 평북 15호 79명, 충북 기타를 합하여 총 300호, 1,300여 명이다.

지금도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일대에는 평안도촌(平安道村)과 경상도촌(慶尙道村)이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철원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동향 출신끼리 자연히 한데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서로 의지하면서 고된 타향살이를 이겨냈다. 평안도촌은 평안촌 또는 피양촌이라고도 불리는데 철원군 동송읍 대위리[오덕6리 송학동]와 장흥2리 지역에 형성되었다. 경상도촌은 1927년 경상북도 영천, 영주, 하양 등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장흥리 지역 자연부락인 도덕동, 강회동, 송대동, 부흥동, 신평동 등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이주 당시 김씨, 권씨, 이씨, 손씨 등 4개 성씨가 주축이 된 10여 세대가 장흥2리 새말에 이민촌을 이룬 것이 경상도촌의 시초이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본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산미증식정책의 일환으로 철원중앙수리조합이 설립되었고 전국에서 대거 소작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들은 불이농장에서 농노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고 생활이 워낙 힘들어 일부는 터전을 버리고 만주로 이주하였다. 많은 이주민들이 다시 만주로 간 것을 보면 당시 일제의 수탈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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