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36
한자 弓裔
영어공식명칭 Gungye
이칭/별칭 선종(善宗)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891년 - 궁예 기훤에게 의탁
활동 시기/일시 891년 - 궁예 양길의 명령으로 강원도 일대 공격
활동 시기/일시 896년 - 궁예 철원을 도읍으로 건국
활동 시기/일시 898년 - 궁예 송악군으로 천도
활동 시기/일시 901년 - 궁예 후고구려 건국
활동 시기/일시 904년 - 궁예 마진 건국
활동 시기/일시 905년 - 궁예 철원 천도
활동 시기/일시 911년 - 궁예 태봉 건국
몰년 시기/일시 918년 06월연표보기 - 궁예 사망
출생지 경주(慶州) - 경상북도 경주시
성격 국왕
성별
본관 경주

[정의]

남북국 시대 강원도 철원 지역을 거점으로 태봉을 건국한 왕.

[개설]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인물로, 당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을 정도로 맹위를 떨쳤으나, 말년에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를 펼친 결과 민심을 잃고 폐위되었다.

[가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궁예(弓裔)의 성은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이다. 나라에 해가 될 아이라는 불길한 예언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을 위기에 놓였으나 유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왕명을 받은 사자가 궁예를 누대 밖으로 집어던지자 유모가 숨어 있다가 몰래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현전하는 궁예의 가계 기록은 설화에 가깝지만,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설화를 토대로 궁예가 신라 왕실에 대하여 보인 강한 적개심을 설명하고 있다. 궁예는 경주를 멸도(滅都), 즉 멸망할 도성이라 칭하고 부석사(浮石寺)의 신라 왕 초상을 칼로 내리치는 등 유독 신라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전한다.

[활동 사항]

궁예는 10대 시절 자신의 출신을 알고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하여 스스로 선종(善宗)이라는 법호를 사용하였다. 진성여왕 대를 전후하여 신라 전역이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따로 무리를 모아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891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기훤으로부터 멸시를 받자 얼마 후 북원의 양길(梁吉)[또는 양길(良吉)]에게 귀부하였고, 양길의 명령으로 북원 인근과 명주·주천 등 강원도의 거점을 공략하였다.

894년 양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의 무리를 거느리게 된 궁예는 명주에 입성한 뒤 주변의 추대에 힘입어 장군을 자칭하였다. 당시 궁예가 통솔하던 무리는 사료에 따라 600명으로 전하기도 하고, 3,500명으로 전하기도 한다. 895년 8월에는 철원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896년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고, 송악군의 사찬이었던 왕융(王隆)이 아들 왕건(王建)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898년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긴 궁예는 3년 뒤인 901년 왕을 칭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歷)에 따르면 당시 궁예는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궁예는 신라를 상대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함으로써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903년 도읍 이전을 계획한 궁예는 철원과 부양(斧壤)[현 북한 지역 강원도 평강군]을 후보지로 삼아 실사한 뒤 904년 철원을 새로운 도읍으로 선정하였다. 904년은 궁예가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한 뒤 광평성을 비롯한 중앙 정치기구를 설치한 해이기도 하다. 905년에 화려한 궁궐을 신축하여 철원으로 천도한 궁예는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909년 궁예왕건을 선봉으로 삼아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함락하였고, 910년 나주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후백제의 중심부인 지금의 전라남도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로써 후삼국 가운데 가장 맹위를 떨치게 된 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변경하고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돌연 신정적 전제주의에 가까운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미륵불을 자칭하며 두 아들을 각각 청광보살(靑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로 불렀고, 스스로 경전을 짓거나 강설을 하였다. 유력한 신하들을 모반죄로 몰아 숙청하거나 일반 백성이나 아전들을 무고하게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915년에는 간언을 하던 부인 강씨(康氏)와 강씨가 낳은 자식들마저 처형하는 등 궁예의 공포정치는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궁예는 민심을 잃고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왕건에 의하여 918년 폐위되었다.

[저술 및 작품]

궁예는 말년에 미륵불을 자처하며 20여 권의 불교 경전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묘소]

『삼국사기』에는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가 산으로 도망쳐 방황하다가 부양(斧壤)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과는 별개로 강원도에는 궁예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에 걸쳐 있는 명성산(鳴聲山)에서 궁예가 살해당하였다는 것이다. 명성산은 우리말로 울음산인데, 궁예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크게 통곡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산의 이름을 울음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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