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016
한자 朝鮮民立大學鐵原地方部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흥수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초 강원도 철원군에서 조선민립대학의 설립을 지원하기 위하여 지역 유지, 군수, 면장, 청년회 등이 주체가 된 지방 조직.

[교육 목표(교훈 포함)]

일본제국주의의 「교육령」에 설치된 「대학령」 12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설립하는 관립대학은 입학 대상과 교육 내용을 볼 때 식민지정책을 수행하려는 야욕이 명백하였다. 이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교육에 저항하여 이상재(李商在)[1850~1927]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교육과 민족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조선민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민립대학 철원지방부가 조직되었다.

[변천]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은 이상재 등 사회 각계의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중앙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가 지방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1923년 3월 29일 전국 170여 군에서 1,000명 이상의 발기인이 선정되었고 이중 462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면서 중앙부가 조직되었다. 이어 1923년 5월 10일 경성지방부 설립을 시작으로 각 지방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가 조직되었는데 각 군에 지방부가 설치되고 군 지방부에서 각 면에 지회를 두었다. 강원도에서는 이천군, 철원군, 통천군, 평강군에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회가 설립되었으나 철원과 통천에서만 지방부가 설립되었다.

[교육 활동]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발기 총회에서는 제1차 사업으로 400만 원을 모금하여 법학부, 경제학부, 문학부, 이학부를 설립하고 제2차 사업에서는 총 1,250만 원으로 공학부, 농학부, 의학부를 추가하여 7학부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중앙부 참여 인사들의 출신 성분과 이념, 활동 단체, 성향의 다양성으로 인해 또 일본제국주의의 분열 책동,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 등으로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의 추진력은 크게 약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부는 순회 위원 파견과 선전 활동을 주로 하였고 지방부의 조직에는 관여하지 않아 중앙부와 지방부는 조직적 연결성이 약한 상태였고, 군 지방부 발기인 구성이 종교 단체, 교육 단체, 실업단체, 언론기관, 노동단체, 부인 단체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여 협의를 거쳐 선정되지 않고 특정 단체 혹은 몇몇 유지들이 스스로 발기인을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 철원지방부는 철원 지역의 유지들이 주도하여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조직하였는데 다른 지역의 지방부와 같이 집행위원장, 집행위원, 상무위원, 회금보관위원, 감사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기성회는 각 지방부에서 모금되는 자금을 보관하기 위하여 한일·한성·상업·해동은행에 구좌를 개설하여 전국의 면을 단위로 모금을 하였으나 모금 계획이 구체성을 띠지 못하고 조직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역의 유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방해와 약정 방식으로 인한 모금의 곤란, 모금액을 중앙부에 송부하지 않고 지방부에서 관수하였으며, 지방 유지들의 참여 부족 등으로 조선민립대학 지방부를 통한 모금 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에는 지방부를 통한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은 실패하였으며 철원지방부 역시 그 성과적인 면에서 전국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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