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260
한자 孤石亭記
영어공식명칭 Goseokjeonggi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재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몰년 시기/일시 1318년 - 정오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288년연표보기 - 「고석정기」 저술
배경 지역 고석정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태봉로 1825[장흥리 20-1]지도보기
성격 기문(記文)

[정의]

고려 후기 승려인 무외국통 정오가 강원도 철원군의 고석정을 보고 지은 기문.

[개설]

「고석정기(孤石亭記)」는 고려 후기 승려인 무외국통(無畏國統) 정오(丁午)[?~1318]가 1288년(충렬왕 14) 가을에 만행(萬行) 등과 함께 철원군 일대를 여행하다가 고석정을 보고 느낀 바를 정리하여 지은 기문(記文)이다.

정오는 고려 후기에 전라남도 강진의 백련사(白蓮社) 결사에 참가하였으며, 말년에는 묘련사(妙蓮寺) 에서 보냈던 국통(國統)까지 승계가 올랐던 인물이다. 정오는 「고석정기」 이외에도 여러 기문과 불교 관련 저술들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암거일월기(庵居日月記)」, 「원의국통제문」, 「대인천모소」, 「동전십왕전소(同前十王前疏)」, 「천라재신소」, 「법화경경찬소(法華經慶讚疏)」 등이 있다. 「고석정기」는 『동문선(東文選)』 권 68에 전하여지고 있다.

[내용]

「고석정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원군에서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신선의 구역이 하나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고석정’이라 한다. 그 정자에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나 높이가 300척 가량 되고 둘레는 10여 장(丈)쯤 된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구멍 하나가 있어서 기어 들어가면 집같이 생긴 층대가 있는데, 10명쯤 앉을 수 있다. 옆에 돌비가 세워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이 놀러 와서 세운 비이다. 구멍에서 나와 꼭대기에 오르면 판판하여 둥근 단(壇)과 같은데 거친 이끼가 끼고 푸른 솔이 둥그렇게 서서 마치 요를 펴고 푸른 일산을 펴놓은 듯하다. 또 큰 내가 동남쪽으로부터 흘러 언덕을 끼고 돌을 굴려 여러 풍류를 갖추어 놓은 것 같고, 바위 밑에서는 고인물이 못이 되어 가까이 가서 보면 벌벌 떨릴 만큼 두려워 마치 신기한 물건이 사는 것 같다. 그 물이 넘쳐 쏟아져서 서쪽으로 30리쯤 흘러가다가 서남쪽에서 부딪쳐 남쪽으로 흐르는데, 앞뒤에 모두 바위와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고 단풍나무·남(楠)나무·소나무·상수리나무가 그 위에 있어서 그 신묘하고 맑고 시원하고 기이한 형상은 비록 글에 능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라도 아마 비슷하게 묘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난 무자년 가을에 산인 만행(萬行) 등과 찾아왔었는데, 처음 볼 때는 정신이 상쾌하더니 마지막에 오르니 사려(思慮)마저 끊어져서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모든 것이 잊혀져 해가 저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늦게서야 왔다는 탄식을 하고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미 그 모양을 기록하고 또 시(詩)로써 표한다[自鐵員郡南行萬餘步. 有一神仙之區. 相傳曰孤石亭焉. 其亭也. 巨巖斗起僅三百尺. 周十餘丈. 緣巖而上. 有一穴. 蒲伏而入. 如屋宇層臺. 可坐十許人. 傍有珉石立焉. 乃新羅眞率王來遊. 而所留碑也. 却出穴登絶頂. 盤陁如圓壇. 荒蘚衣以鋪茵. 靑松環而張傘. 又有大川. 自巽而來. 砯崖轉石. 如衆樂俱作. 至巖下. 潴爲淵. 臨視之. 兢戰可畏. 如有神物居焉. 其水溢奔西走一舍許. 觸坤而南流. 前後皆巖巒壁立. 楓楠松櫟. 雜生其上. 若夫神妙淸爽. 奇形異狀. 雖工文善畫者. 殆難得其彷彿矣. 予越戊子秋. 與山人萬行等尋之. 始見而神爽. 終陟而慮絶. 嗒焉坐忘. 不覺日之夕矣. 於是. 發晚遊之嘆. 有再訪之期. 旣記其狀. 又以詩志之].”

[특징]

「고석정기」에 등장하는 신라 왕은 진평왕(眞平王)[?~632]이라는 설이 통설인데, 이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 일본인 역사학자 마에다 교사쿠[前間恭作, 1868~1941]가 진평왕을 진흥왕[526~576]이라고 주장하면서 “황초령비(黃草嶺碑)는 본시 감문(甘文)[지금의 경상북도 개령]에 있었고, 마운령비(磨雲嶺碑) 는 본시 철원에 있었던 것을 조선 전기 관북경영(關北經營) 때 옮겨 놓았다.”라고 추정하였던 적이 있었다. 현재 이러한 논란은 종식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석정기」에는 고석정 주변의 풍광과 형상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석정기」를 통하여 신라의 진평왕이 고석정에 직접 방문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비석이 고려 충렬왕 때까지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 뒤를 이은 진평왕 때도 여전히 신라의 영토로 신라의 왕들이 순수(巡狩)를 실시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의 가치도 지닌 기문이다. 비석의 실체는 1589년까지 존재하였는데, 1620년과 1626년 사이에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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