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남으로도 북으로도 갈 수 없었던 수복 지구 사람들의 애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06
한자 -戰爭當時南-北-收復地區-哀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정의]

6·25전쟁 당시 남으로도 북으로도 갈 수 없었던 수복 지구 철원 사람들의 운명적인 삶과 애환.

[개설]

6·25전쟁 당시 철원 사람들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반격하고 인민군들이 쫓겨갈 때 철원 주민들의 80%를 끌고 올라갔다. 하지만 공산주의 열성분자들의 횡포가 싫은 사람들은 대열에서 이탈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한국군과 인민군, 유엔군과 중공군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국군이 들어오고 밤에는 인민군들이 습격하였다. 그 사이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몇 명이나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산속에 숨어든 사람들은 언제 내려와야 할지 몰랐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안되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왔다가는 그냥 죽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이탈하기도 힘들고 남쪽으로 간다고 해도 간첩으로 오인받기 때문에 무조건 총살이다. 1951년 5월경 미군이 중부 전선 철원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산속에 숨어든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후방으로 격리시켰다. 하지만 남자들은 서울 피난지로 바로 간 것이 아니라 전선의 미군과 한국군을 돕는 노무자로 차출되어 철원을 방어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수복 지구 철원 사람들은 6·25전쟁 기간 산속에 숨어서 자신의 운명조차 결정하지 못한 채 홀로 극한의 삶을 이겨 내야 했다.

[주민의 삶을 바꾼 전쟁과 수복]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철원군과 철원 군민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철원군은 수복 지구이다. 수복 지구는 전쟁 전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 후 남한에 편입된 지역이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철원군은 전쟁 전 공산 치하에 있었다. 전쟁 후에는 원래 철원군 면적의 2/3가량만 남한에 수복되었다. 아직도 1/3은 미수복 지구로 남아 있다. 전쟁 직후 그어진 휴전선은 한반도를 다시 갈라 놓았고 철원군도 갈라졌다. 전쟁 초기 철원군 청년들은 대부분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전쟁터에서 개죽음을 당할까 봐 학생들은 친척집으로 피신하거나 산속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열성분자들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을 악랄하게 감시하고 위협해 하는 수 없이 도피처에서 나와 전쟁터로 향해야 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이 지난 8월 말을 기점으로 전세가 뒤집어지고 퇴각 명령이 나자 전선에서 탈영하여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귀환하였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 북한에 남아 있거나 전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부 전선 한복판에 위치한 철원군은 전쟁 초기 북한 인민군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 미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되었다. 실제 철원에서 출발한 인민군이 26일 의정부, 27일 서울의 미아리를 접수하고,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전쟁 발발 한 달도 안 되어 철원읍김화읍 시내에 미군 비행기 기총소사와 폭탄 투하가 집중되었다. 나무와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진 주택들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 어떻게 손써 볼 틈도 없이 4~5일 만에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어른들 증언에 의하면 전쟁 초기 이미 대부분 시가지와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헛간 아래나 뒷산 어귀에 방공호를 파고 몸을 숨겼다. 특히 입대 적령기에 해당하는 20대 전후 청년들은 깊은 산속이나 한탄강 절벽 동굴, 땅굴 등지로 도피하였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6~7개월 동안 숨어 지내야 하였다. 퇴각하는 인민군들과 마을 인민위원장들은 병력이 줄어들자 인민군에 보낼 새로운 장정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50년 10월 미군과 국군이 마을에 진주하면서 인민군 징집을 피하여 산속과 땅굴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마을로 내려와 치안대가 되어 인민군 패잔병을 격퇴하고 국군의 작전을 도왔다. 인민군에 나갔다가 돌아온 청년들은 대부분 부상을 입어 집 안 깊숙이 몸을 숨겼다. 공산 치하에서 마을 인민위원장, 세포위원장을 하던 열성분자들은 이미 퇴각하는 인민군들과 북으로 도망갔다. 6·25전쟁으로 철원군 원주민 80%가 뿔뿔이 흩어져 고향을 떠났는데 인민군이 퇴각할 때 대부분 북으로 같이 올라갔다. 하지만 채 두 달도 안 되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이번에는 치안대 활동을 했던 청년들이 월남을 하거나 다시 산속에 몸을 숨겼다. 이렇게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마을을 점령하면서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나마 생존한 사람들도 증언을 꺼리고 있어 실제 알려진 숫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공군이 개입하여 미군이 퇴각하는 1·4후퇴 때 철원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모두 남쪽 후방으로 피난시킨다. 이른바 소개(疏開) 작전이다. 소개는 “주로 적의 포격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고자 전투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넓히거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을 뜻하는 군사용어다. 닥치는 대로 주민들은 GMC 트럭에 실어 38선 부근 포천 문하리에서 1차로 간추리고 다시 경기도 광나루[서울 천호동]로 보내졌다. 소개 작전과 동시에 초토화 작전이라고 해서 철원 시가지를 불 질러 완전히 없애 버렸다. 포천 문하리에서 웬만한 남자들은 101사단 노무사단[KSC]으로 차출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노무대원들은 자기 고향 근처에서 미군의 전쟁 수행을 도와 인민군 남하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루에 두 번씩 포탄을 등에 지고 금학산을 오르내렸다. 백마고지 최전선에 철조망을 가설하고 갈현고개 꼭대기에 참호도 팠다. 전투병을 도와서 진지를 구축하고 임시 다리를 놓거나 식사를 추진하고 시체를 치우는 등 전선에서 이뤄지는 잡다한 일들은 모두 처리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당시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지게부대[노무부대]가 아니었으면 한반도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6·25전쟁 기간 중에 대부분 지역 주민들은 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북으로 갈 수도 남으로 갈 수도 없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틈새에서 연명하였다. 남아 있던 철원 주민들이 어떠한 상황이었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몇 명의 증언을 소개한다.

[이주성(李周成) 1928년생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열흘간 계속해서 탱크와 세발 오토바이 그리고 인민군들이 남으로 내려갔다. 주로 초저녁이나 새벽에 많이 나갔는데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계속해서 나가서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어디를 점령하였고 어디를 차지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전쟁이 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인민군 징집이 이어졌는데 나는 대한청년단 관련 사건이 있어서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아예 징집 대상이 아니었다. 며칠 지나서 전세가 역전되어 부상당한 사람과 찔뚝거리는 사람 등 나갔던 인민군들이 패잔병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인민군에 끌려갈까 봐 다시 그들의 눈을 피하려고 김치 광에 땅을 파 굴을 만들고 그 속에 숨어 지냈다. 징집을 피하려고 자해하기 위하여 옻나무 진을 몸에 바르고서 목이 부어 20일 넘게 앓아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임응재(任應宰) 1931년생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

1951년 미군이 진주하여 철원 지역 주민들을 모두 후방으로 소개시켜 만세교 근처 문하리로 피난하여 며칠 머물다가 미 3사단 10공병대 노무자로 수개월간 일하였다. 당시 포천 만세교 문하리에는 철원에서 피난 온 사람 수천 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건장한 사람을 차출하여 공병대 소속 노무자[징용자]로 활용하였다. 공병대 소속 노무자들은 주로 도로 복구와 교량 건설, 참호 구축, 철조망 건설 등에 동원되었고, 공병대 소속의 KSC와는 신분이 전혀 달라 징용 해제 후에 다시 군복무를 하여야 했다. 노무자 생활이 여의치 않아 다시 나와 친구 몇 명과 당시 토성리, 지경리, 문혜리 등지의 미군부대를 찾아다니며 군속 자리를 구하던 중에 미 10포병대 군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철원, 김화에서 주둔하며 장교 식당에서 3년쯤 일하였다. 당시 군속은 1개 중대 7~8명 정도가 일하였고 한 달에 2,000원 급료를 받았으며 일단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어 누구나 원하였다. 당시 미군부대에 근무하면서 고향소식을 탐문해 보니 고향에는 민간인이 전혀 없었고 가족들 근황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상욱(李相旭) 1932년생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

유엔군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철원을 지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더라도 철원과 김화, 평강 지역에는 인민군 패잔병이 항상 1개 사단 정도는 머물고 있었다. 당시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마을을 점령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의 운명도 오락가락하였다. 국군이 마을에 진주하여 친구 아버지가 치안대장이 되어 16세에 치안대 생활을 하게 되었고, 빨갱이 색출과 마을과 마을 간의 소식 전달이나 공무 심부름을 주로 하였다.

인민군 패잔병이 다시 마을을 점령하게 되어 치안대 생활을 한 것이 발각이 나 인민군에 끌려가던 중 당시 인민위원장이 마을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구명하여 가까스로 마을에 남게 되었고, 할 수 없이 민청반장을 하였다. 치안대 생활한 것을 누가 고발하여 철원읍의 인민군 연대 본부로 끌려가던 중에 감시 소홀을 틈타 도망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민군이 퇴각할 당시 우리 마을 72세대 중에 54세대가 북으로 갔고, 나중에 확인하여 보니 18세대만이 남으로 나왔다. 어떤 집은 남북으로 식구가 갈려 이산가족이 된 경우도 발생하였다. 당시 전쟁 중이라도 최소한의 식량 확보를 위한 농사는 계속 지었었다. 미군이 진주하여 철원은 곧 치열한 전쟁터가 될 것이니 약 15일 정도 피난 가 있으라며 간단한 가재도구만 갖추고 빨리 트럭에 올라타라고 하여 양문 문하리 임시 피난민수용소에 소개되었다.

문하리에 머물던 중에 미군들이 전쟁 노무자로 젊은 청년들을 차출하였는데, 이래저래 끌려가나 피난생활하며 빌어먹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아버지에게 말하고 노무대에 자원하였다. 차출된 사람 중에서 젊은 사람 위주로 편성하여 정식 군인과 같은 101사단 노무사단[KSC]이 결성되어 철원 인근 지역에서 도로 복구 및 교량 보수, 백마고지 근처 최전방의 철조망 가설, 지뢰 매설, 탄약 운반, 환자 수송, 사망자 처리 등의 일을 하였다. 101사단 노무사단에서는 철원읍 시가지에 나와 잔존하는 건물이나 가옥이 인민군의 은폐지나 피신처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두 기름을 붓고 불 질렀는데 이를 초토화 작전이라 한다. 최전방 전선에서 철조망 가설 중에 적의 사격으로 죽은 이가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고비도 많이 넘겼다. 노무대는 1~3급 등급을 나눠 임금을 지급하였고, 휴가와 제대도 있었다. 하지만 휴가에도 갈 곳도 없고, 제대해야 전쟁 중에 정착할 곳도 없고 고향은 전쟁터로 바뀌었으며 가족이 어디 있는지 알 길도 없어 그대로 잔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전쟁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1951년 5월부터 1953년 7월 휴전이 되기까지 2년간 철원 지역의 전투는 가장 치열하였다. 특히 백마고지에서는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중공군이 점령하는 일진일퇴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였고 너무나 많은 폭격으로 산의 높이가 1m 이상 깎여 나갔다고 한다.

[이장성 1919년생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공산 정권 초기에는 조만식이 주도한 조선민주당에 가입하여 원산에 가서 한 달간 교육을 받기도 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싫어 숨어 지냈고 국군이 진주하자 남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1·4 후퇴 때 홀로 걸어서 수원까지 피난하여 수원비행장에서 일하여 콩 한 줌 배식으로 허기를 달래었다. 밥벌이가 여의치 않아 목숨을 연명하려고 동두천 미군 노무대[보급대]에 자원 입대하여 1년간 포천, 철원의 금학산, 담터, 백마고지 전투 지역에서 철조망 가설, 포탄 운반, 식사 추진, 부상자 운송 등의 일을 하였다. 당시 탄알 운반 중 적의 사격으로 죽은 동료 노무자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려 하였으나 미군들이 차이니즈라 하며 놔 두라고 하여 못 하였던 것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있다. 미군 노무대에서 나와 서울로 갔으나 신분 증명서가 없어 몸에 지닌 돈을 모두 뺏기고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였다.

[윤석원(尹錫元) 1934년생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

9·28수복 후 동막리에 국군이 진주하여 17세 어린 나이에 치안대 활동을 하였다. 그해 겨울 인민군의 재진입[1·4후퇴]으로 산에 숨어 지내다가 체포되었으나, 전에 치안대 활동할 때 어쩔 수 없이 임명된 마을 인민위원장을 구명해 주었던 일이 인연이 되어 풀려날 수 있었다. 1951년 봄 국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양문 문하리로 소개되어 피난 중에 노무대에 차출되어 일반 노무자로 일하다가 51년 8월 16일 담터에서 101사단 노무사단[KSC]이 결성되어 정식 입대하여 노무대 관리 기간사병이 되었다. KSC는 전투병과 마찬가지로 이동이 많았기 때문에 일정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으며, 주로 참호, 교통호, 진지 구축과 탄알 수송, 식사 추진, 부상병 이송, 시체 운반 등의 일을 하였다. 철조망 가설, 도로 복구, 지뢰 운반 등도 중요한 임무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작전회의에서 미 공군과 포병의 지원사격이 결정되면, 전투 부대원들의 임무도 결정되고, 각 노무부대의 임무도 하달되는데,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식사는 배급되는 알랑미와 보리쌀, 완두콩에다 벌판에서 추수한 호박, 오이, 감자 등으로 직접 요리하여 먹고, 천막 없이 노숙을 주로 하였다. 1951년 봄 형성된 주저항선을 사이에 두고 2년간 고지를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1952년 연천 노루고지 전투 때 한국군 탱크부대가 처음 창설되어 포를 쏘았고, 백마고지에는 9사단이 있었는데 낮에는 아군이 공격하고, 밤에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꽹과리, 징, 북을 치며 새까맣게 공격하였다. 당시 국군은 휴전에 반대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중공]이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휴전협정을 강행하였다. 1953년 3월 4일 노무대를 제대하고, 1955년 내대리에 입주하던 해에 현역 육군으로 입대하여 수송부에서 근무하다 만기 제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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