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11
한자 雄志-悲運-鐵原歷史人物三人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조선,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규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 역사 인물인 궁예·최영·박용만에 관한 이야기.

[개설]

철원군은 한반도의 중심부이고 지정학적 요충지이기에 여러 국가가 대립하는 분열의 시기에는 서로 뺏고 뺏기는 쟁패의 대상이 되었다. 삼국 시대 때 백제, 고구려, 신라가 100년을 주기로 번갈아 가며 철원을 차지하였다. 철원 지역은 점령자들이 수시로 바뀌어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철원군의 역사적 운명을 반영이라도 하듯 철원군 중심부를 흐르는 한탄강(漢灘江)은 원래 아름다운 큰 여울을 뜻하지만 종종 한(恨)이 맺힌 한탄강(恨灘江)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철원 출신이거나 철원을 기반으로 활약한 인물들 중에는 웅지를 펴지 못하고 꺾인 3인방이 있다. 대동방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918], 고려 말 왜구 토벌의 선봉장 최영(崔瑩)[1316~1388], 일제 강점기 군대 양성을 통한 독립 쟁취를 주장한 박용만(朴容萬)[1881~1928]이 바로 그들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과 대립했던 인물들이 모두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는 점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 등이 새로운 정권의 주인공들이며, 역사상 숙적 관계로 패배자와 승리자의 업을 나눠 가진 경쟁자였다. 이들 3인방은 역사적 패배자이기에 비난의 굴레를 뒤집어써야 하였고, 지금까지도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운의 3인방이 추구했던 웅지를 재조명하고 우리나라 역사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대동방국 건설을 꿈꿨던 궁예]

통일신라 왕자 출신인 궁예는 태어날 때 이미 이빨이 나 있고 하늘로부터 신비로운 빛이 비치는 신이(神異)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향후 왕권에 불길한 징조라는 모함이 일어 당장 죽여 없애 버리라는 왕명이 떨어지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유모에 의하여 궁성에서 빼돌려져 영월 세달사(世達寺)에 맡겨졌고 탈출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게 되었다. 자신을 버린 신라 왕조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던 것이다. 세달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궁예는 혼탁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891년 절을 뛰쳐나와 가사(袈裟)를 입은 채 반(反)신라 대열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에는 죽주[현 경기도 안성시]의 기훤(箕萱), 북원[현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梁吉) 등 초적(草賊) 세력들과 손잡고 2년 만에 치악산의 석남사와 영원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영월·평창·울진 등 강원도 남부 일대를 복속시켰다. 894년 궁예는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릉에 들어갔는데, 토호 김순식의 도움으로 3,500명 대군으로 거듭나 장군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 당시를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궁예가 사졸들과 즐거움과 괴로움, 힘듦과 편안함을 함께하고 사사로움 없이 상벌을 공정히 하여 부하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에 추대”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대부분의 기록이 궁예에 대해 왜곡하거나 폄하하고 있지만 이 부분만은 그렇지 않다.

14대로 편제도 갖추고 기세가 오른 궁예의 군대는 895~896년 서진(西進)을 거듭하여 인제·화천·금성·김화 지역을 아우르고 단숨에 철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군세가 매우 커지자 황해도와 평안도의 호족들과 왕건 부자가 귀부하여 군사력과 경제력은 더욱 커졌고, 이를 기반으로 898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부 남한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된 궁예는 901년 고려(高麗)[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만주 일대를 호령하던 고구려를 이어 대제국 건설을 꿈꾸던 궁예는 904년 철원 북방 풍천원에 청주 지역민 1,000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지었다. 이 무렵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911년 태봉국(泰封國)을 만방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도·경기도·황해도 대부분과 평안도·충청도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미륵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세달사를 나온 지 20년 만에 한반도 남부 지역 2/3를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는 송악을 근거로 하는 패서(浿西) 세력의 수장 왕건왕건을 따르는 무리들의 반란으로 918년 왕위에서 쫓겨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비록 18년의 짧은 왕조였지만 궁예는 썩어빠진 골품제로 겨우 왕위를 이어 가며 부패할 대로 부패한 통일신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능력이 우선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뛰어난 정복 군주였다. 궁예의 탁월한 자주성과 진취성은 그대로 고려 왕조의 기틀이 되었고, 후일 500년 왕조를 이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요동 정벌을 지휘했던 고려 말 명장 최영]

고려 말 명장 최영의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동주가 철원의 고려 초기 지명이고, 동주최씨 시조 최준옹(崔俊邕)의 4세손인 최석(崔奭)의 묘가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323번지 학저수지 옆 돈지산(頓地山)[뱀산]에 있다. 최영과 아버지 최원직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최영의 아들인 대호군 최담(崔潭)의 묘는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에 있다.

최영과 관련해서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최영은 평장사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이다. 아버지 최원직은 벼슬이 사헌규정에 이르렀다. 최영은 용모가 장대하며 완력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각주에 “본관은 철원이며 5대조는 최유청의 아들 최양(崔讓)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최정소(崔貞紹)였다. 할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최옹(崔雍)이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고려 말 수많은 전공을 세운 최영은 이상하리만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최영의 출생지는 동주최씨 가문 내력이나 선영,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내용을 보면 철원이 확실하다.

최영의 전공(戰功)은 너무 많아서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다. 가장 두드러진 것만 언급하면 1358년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에 임명되어 왜선 400여 척을 격파하였고, 1359년 서경을 점령한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1361년에는 개경까지 쳐들어온 홍건적을 격퇴하였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과 1374년 제주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1376년에는 삼남 지방에 쳐들어온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대파하여 철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1377~1378년 왜구를 섬멸하였고, 1380년 해도도통사로서 왜구 때문에 수도를 개경에서 철원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철회시켰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최영은 공민왕과 함께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출정 명령을 내렸지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최영은 이성계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중용하였지만 결국 이성계의 모반으로 실각하고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최영이 역사상 추앙받는 이유는 전장에서 백전백승의 전과를 남겨 무인(武人)의 기개를 만방에 떨쳤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한 청백리이자 사심 없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 주창자 박용만]

박용만은 무장투쟁에 의한 조국의 독립을 주창하였던 대표적 인물이다. 박용만이 무장 독립투쟁론을 주창한 이유는 당시 그 어느 제국주의 국가들보다도 악랄하게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제의 잔학성을 실질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장투쟁론자로만 알려져 있는 박용만은 일본 게이오의숙과 미국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 국제적 엘리트였다. 박용만은 정치사상은 물론이고 국어, 언론, 군사,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춘 선각자였다.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박용만은 준비론을 주장한 안창호(安昌浩), 외교론을 주장한 이승만과 더불어 미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박용만은 1881년 7월 2일 철원군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났다. 박용만의 아버지는 근대식 교육을 받게 하려고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파 인사인 동생 박희병(朴羲秉)에게 아들을 맡겼다. 박용만은 작은아버지의 주선으로 1895년 일본 게이오의숙으로 유학을 떠났고,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유신 개혁파인 활빈당(活貧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로 인하여 1901년 3월 귀국 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1904년 주한 일본공사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보안회(輔安會)가 주도한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이승만과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되면서 두 사람의 운명적 관계도 시작되었다.

1905년 출옥한 박용만은 미국 망명길에 올라 박희병과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시로 가게 되는데, 이때 박용만은 이승만이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 원고를 트렁크 밑에 숨겨 미국으로 반출하고 이승만의 외아들 이봉수를 미국 동부까지 데려다 주었다. 박용만이 해외 망명을 택한 것은 한일의정서와 러일전쟁으로 이미 한반도가 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상황이었고 미국에서 공부한 바 있는 박희병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박용만은 1905년 덴버의 콜로라도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 입학하였다. 1908년 주립 네브래스카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며 ROTC 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 내에 한인 최초의 국외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학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0년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공식 이전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 때 입소하여 평균 8주간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 군사학교 체제였고, 수학 과정은 3년으로 오전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군사훈련을 받는 둔전병제(屯田兵制)로 운영되었다. 둔전병제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해야 하는 독립군에게는 가장 시의적절한 체제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일본 측의 공식 항의로 1914년 8월 8일 6기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세계를 주도하던 미국 땅 한가운데에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가 최초의 독립군 양성 기관인 한인 군사학교를 공식적으로 세웠다는 점이 박용만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용만은 1912년 12월 활동 근거지를 하와이로 옮기고, 1914년 6월 10일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많은 교민들로부터 부지와 자금을 제공받은 대조선국민군단은 하와이 군사령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은 군사 집단이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한인소년병학교와 같이 둔전병제로 운영되었다.

박용만과 이승만의 숙명적인 관계에 관한 일화가 많다.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은 박용만이 1908년 여름 덴버에서 소집한 애국동지대표회 및 1912년 한인소년병학교 제1회 졸업식 등에 먼 길을 달려와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이승만을 당시 5,000명의 한인 동포가 사는 하와이로 초청한 사람도 박용만이었다. 1912년 12월 초에 박용만이 먼저 하와이에 당도하였고, 뒤를 이어 1913년 2월 초에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독립투쟁 방안에 관한 근본적인 노선 차이로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외교 독립 노선에 집착하였던 이승만은 무장투쟁 노선을 고집하였던 박용만의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대조선국민군단 계획에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18년 1월 이승만이 법정에서 박용만을 “한국인 군단을 설립하고 일본 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파괴할 음모를 가진 자”라고 증언하면서 두 사람은 영원히 멀어지게 되고 정적(政敵) 관계가 되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 수반인 이승만을 탄핵하는 데 박용만이 앞장서면서 갈등과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박용만은 무조건 무장투쟁만 강조했던 것은 아니며,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사상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 주필이 되어 주장한 무형국가론은 1912년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 결성의 기반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는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박용만은 임시정부를 일러 “원래 국가의 성립은 백성과 토지로 기초를 삼고 법률과 정치로 집을 만드는 것이나 시방 우리는 백성은 있고 토지는 없어 불가불 남의 토지 위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고로 무형의 국가”라고 지칭하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8년 전에 이미 망명정부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에서 박용만의 선지자적 식견을 알 수 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박용만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공로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은 중국 북경에서 이해명이 쏜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박용만이 피살당한 이유로는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총독 밀회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독립운동계에 일파만파로 퍼진 조선총독 밀회설로 인하여 박용만은 독립운동사에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그동안 역사에서 지워져 있었다. 일제가 당시 박용만에 대하여 작성한 300건이 넘는 기밀문서 어디를 뒤져 봐도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정보 문서에는 오히려 박용만을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 “불령선인”으로 표현하는 등 요주의 인물로 여겼고, 밀정들은 끊임없이 박용만을 감시하였다. 한편, 해당 문서에는 박용만과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간책도 언급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박용만의 조선총독 밀회설이 왜곡되고 과장된 것임을 알려 주는 정황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철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은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동포들의 결속과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 선각자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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