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특공대 공비소탕작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66
한자 警察特攻隊共匪掃蕩作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9년 1월연표보기 - 경찰특공대 공비소탕작전 실시
발생|시작 장소 노래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노래리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경찰특공대

[정의]

1949년 1월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경찰특공대가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5년 광복 이후 청송 지역에서 활동하던 좌익 세력은 1946년 ‘10월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거점을 옮겨 간헐적으로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1947년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되자, 1947년 9월 미국은 소련과의 협의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동시에 미군정은 정부 수립에 대비하여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으로 들어가는 좌익 세력은 더욱 많아졌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파견되었으나 북한과 소련은 유엔의 결정에 반발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결국 1948년 2월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좌익 세력은 선거를 무산시키고 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 유격 활동을 강화하였다. 좌익 세력은 남한의 주요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남조선 인민유격대’라고 불리는 무장 유격대[빨치산]를 조직하였다. 청송 지역에서도 좌익 세력이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여 보현산(普賢山)[1,124m]과 주왕산(周王山)[720.6m]을 거점으로 무장 투쟁을 벌였다.

[경과]

청송경찰서는 좌익 무장 유격대가 청송 지역의 지서(支署)들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1948년 6월 보현산에 있는 좌익 무장 유격대의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이 작전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 대원 10여 명을 사살하고 여러 명을 생포했으며, 총과 실탄 등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시적인 성과에 그쳤고 북한에서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남파된 인민유격대가 기존 좌익 무장 유격대와 합류하여 활동하면서 다시 치안이 위협받고 주민들의 피해도 커졌다.

청송경찰서는 여러 차례 좌익 무장 유격대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타격을 가했지만 이들의 활동을 근절시키지는 못하였다. 경찰은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한 방안으로 현동면 도평리에 거주하는 이선암(李先岩)을 좌익 무장 유격대 대원으로 위장 침투시켜 좌익 무장 유격대의 정보를 알아낸 후 진압 작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선암은 좌익 무장 유격대에 침투하는 데 성공하여 영덕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좌익 무장 유격대 대장이 1949년 1월 안덕면 노래리에서 청송 지역의 좌익 무장 유격대에 북한의 지령을 전달한다는 정보를 경찰에게 알려 주었다.

[결과]

경찰은 좌익 무장 유격대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찰특공대를 조직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의 접선 장소인 안덕면 노래리로 파견하였다. 경찰특공대는 안덕면 노래리에서 접선하던 좌익 무장 유격대와 격전을 벌여 1명을 체포했으나 좌익 무장 유격대 대원 다수는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경찰특공대는 달아난 좌익 무장 유격대를 추격하여 청송군 파천면 방면과 안동군 길안면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경찰특공대는 안동군 길안면 금곡리에 있는 용담사(龍潭寺)에 숨어 있는 좌익 무장 유격대를 발견하였다. 경찰특공대의 동향을 알아차린 좌익 무장 유격대는 총격전을 벌이면서 달아났다. 그러나 경찰특공대는 추격전을 펴 좌익 무장 유격대 대장 이인호를 비롯한 유격대 대원을 체포하거나 사살하였다. 유격대 대장 이인호는 1946년 ‘10월사건’ 당시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석보지서의 공격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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