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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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邱要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감병훈 |
[정의]
19세기에 김정호가 제작한 청송도호부와 진보현이 실려 있는 조선 전도.
[개설]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청구도』의 이본은 현재 9개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내용적으로는 3개의 유형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중에 『청구요람(靑邱要覽)』은 건(乾)·곤(坤) 2권으로 되어 있고, 남북으로 총 29층, 동서로는 22판으로 구분되어 있다. 『청구요람』에는 김정호가 작성한 「청구도범례(靑邱圖凡例)」가 들어 있는데, 그 내용과 본 지도의 내용이 거의 같아 김정호의 『청구도』 최종본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동국제국도(東方諸國圖)·삼한도(三韓圖)·한사군도(漢四郡圖)·삼국도(三國圖)는 고증이 확실하지 않아 삭제한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는 실려 있지 않다. 또 산줄기를 그리지 않고 산봉우리만 표시한다고 했는데, 본 지도에 동일하게 되어 있다.
호구(戶口)·전결(田結)·곡총(穀總)·군정(軍丁) 등을 기재한다고 되어 있는데,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과의 거리를 적어 넣는다고 되어 있는데, 모두 군현에 적혀 있다. 특히 서울은 특별하여 오부전도(五部全圖)를 첫머리에 기록한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는 되어 있다. 이러한 사항들을 참고하여 『청구요람』은 『청구도』의 최종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청송도호부와 진보현은 건책 19층 8판과 7판에 각기 수록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지도책의 앞머리에는 최한기(崔漢綺)의 서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김정호의 친구라고 소개하며, 김정호가『청구요람』을 어떻게 제작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어 최한기 자신이 만든 범례를 수록하였는데 『청구요람』의 제작 과정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수입한 『기하원본(幾河原本)』에서 배워온 확대 축소법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설명하면서 『청구요람』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제작했음을 밝혔다. 따라서 여러 가지의 제작 이유 중에 학술적인 측면에서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청구요람』은 현존하는 전국 지도로서 가장 크며, 축척이 약 1:216,000에 해당되는 지도이다. 지도의 크기는 세로 870㎝, 가로 462㎝이다. 책의 구성은 남북으로 총 29개의 층으로 구성되었고 동서로는 22개의 판으로 구분되어 있다. 각 층판의 면은 남북 100리[약 40㎞]와 동서 70리[약 28㎞]의 같은 크기로 나누어져 있다.
책의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1.5㎝이다. 이 중에서 제26층과 제27층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건책의 맨 앞에는 서문인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쓴 「청구도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청구도제」의 서문이 『청구도』의 서문과는 약간 다르다. 그 이유는 조협승(曺協承)이 최한기가 소장하고 있던『청구도』를 보고 감탄하여 모사한 후 마치 자기가 서문을 쓴 것처럼 했기 때문이다. 김정호가 쓴 「청구도범례(靑邱圖凡例)」는 『청구요람』에 수록되어 있으나 『청구도』에는 들어 있지 않다.
[구성/내용]
『청구요람』은 조선의 전도(全圖)이기 때문에 청송도호부와 진보현의 내용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먼저 청송도호부를 살펴보면 읍치는 백색 바탕에 흑색 윤곽선을 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표시했고 방광산(放光山) 아래에 있다.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그렸는데, 진보와 안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천은 흑색 실선으로 표현했고 읍치 아래로 남천(南川)으로 흘러 지나간다. 산맥은 따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종산(宗山), 천마산(天馬山)은 표시하였다. 산줄기를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현의 경계는 적색 점선과 흑색 점선만으로 구분했으며, 면(面)과 역(驛)은 흑색 윤곽선을 한 직사각형 모형 안에 표시하였다.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읍치 부근에 청송의 호구수와 전결수, 서울과의 거리를 명기했다는 점이다. 지도에 나와 있는 호구는 3천 300명이고 밭은 2천 300결이며 군인은 1천 400명, 서울과의 거리는 580리[약 228㎞]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보현을 보면 읍치는 백색 바탕에 흑색 윤곽선을 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표시했고, 좌측에는 나야성(羅野城)이 명기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상리면과 각산역(角山驛)이 표기되어 있다. 하천은 흑색 실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읍치 바로 위로 신한천(新漢川)이 흘러가고, 봉람서원으로 추정되는 서원(書院)이 글로만 명기되어 있다. 면과 역은 흑색 윤곽선을 한 직사각형 모형 안에 기록하였다. 산맥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군현과의 경계는 적색 점선과 흑색 점선으로 구분지어 나타냈다. 도로는 적색 실선으로 나타냈고, 영덕과 연결되어 있다. 또 읍치 바로 옆에 호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수는 2천 400명이다.
[의의와 평가]
『청구요람』에는 색인도(索引圖)인 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 고려양계지도(高麗兩界地圖), 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가 그러져 있는데, 이같은 색인도는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김정호만의 방식으로 창조성이 있다. 또 신라 이후 각 군현의 명칭 변화와 더불어 삼국시대 때의 군현을 따로 표기하는 등 정보성이 우월하다. 또한 지도로서는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며, 「청구도범례」에 나타나 있는 지도식(地圖式)은 다른 지도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학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사료로써 가지는 가치가 크다. 아울러 조선 후기 청송 지역의 경계와 다른 고을과의 관계 등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