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74
한자 權寧萬
영어공식명칭 Kwon Yeongman
이칭/별칭 각헌(覺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 3월 15일연표보기 - 권영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5년 음력 1월 15일 - 권영만 대한광복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5년 12월 - 권영만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음력 6월 - 권영만 주비단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 - 권영만 주비단의 군자금 모집사건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0년 04월 06일연표보기 - 권영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권영만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병곡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지도보기
활동지 대한광복회 및 주비단 - 대구광역시 및 서울특별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광복회 총무국장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개설]

권영만(權寧萬)[1877~1950]은 일찍이 의병에 참여하였고, 1915년 음력 1월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후원하는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주비단(籌備團)의 결성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0년 임시정부의 주비단 군자금 모집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이후 광복 정국을 맞이하여 대한광복회 재건을 위해 힘썼으며 김구(金九) 등과 함께 정치 활동에 참여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각헌(覺軒). 1877년 3월 15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에서 권인환(權寅煥)의 아들로 태어나 영양군 입암면 병곡리에서 거주하다가 1922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권영만은 1907년 아버지 권인환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5년 음력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 등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지휘장(指揮長)에 취임하였다.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경상북도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을 탈취하였던, 이른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을 주도하였다. 1917년 11월 경상북도 칠곡에서 독립자금 요청을 거절한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고, 1918년 1월 충청남도 예산에서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는 의거를 실행한 뒤,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었으나 권영만은 한훈(韓焄), 우재룡 등과 만주로 탈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1919년 6월 우재룡, 안종운(安鍾雲), 소진형(蘇鎭亨), 이재환(李載煥) 등과 함께 충청도 일원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임시정부 및 서로군정서 명의의 「군자금 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충청남도 논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으며, 논산의 부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음력 2월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힘썼는데, 1920년 5월 임시정부에서 가지고 온 「주비단규칙서(籌備團規則書)」에 의거하여, 1920년 음력 6월 서울 경신학교(敬信學校)에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주비단의 단원들은 임시정부가 보내 온 공채(公債)를 부호들에게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서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과 연락하면서 총독부 정무총감(政務摠監) 등 일본인 고관의 처단을 계획하였다.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주비단 군자금 모집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주비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5년 9월 조병옥(趙炳玉)·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임시정부와 연합군환영준비회를 조직하고 경호부(警護部)에서 활동하였다. 12월 27일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였는데, 총무국장(總務局長)을 맡아 회장 이종태(李鍾台)·부회장 우재룡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독당(韓獨黨)의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組織部)를 맡았으며, 1948년 4월에는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의 조직부(組織部) 비서(秘書)를 역임하였다. 1950년 4월 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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