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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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龍伊 |
영어공식명칭 | Kwon Yongi |
이칭/별칭 | 용구(龍九),송담(松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01월 04일 - 권용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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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권용이 안동군 임동면 편항시장 독립만세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72년 03월 18일 - 권용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권용이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권용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 3.1운동 발생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 825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 825 |
활동지 | 편항시장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용이(權龍伊)[1903~1972]는 청송군 진보면 출신으로 안동군 임동면 편항시장(鞭巷市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일제 통치기구인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구(龍九), 호는 송담(松潭). 1903년 1월 4일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 825번지에서 권재하(權在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애국심이 투철하여 피 끓는 10대 소년 때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편항시장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진보 지역에는 아직 독립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없었다. 이에 권용이는 진보 출신의 유춘흠(柳春欽), 안봉익(安鳳翼), 조학이(趙學伊) 등과 함께 안동군 임동면으로 달려갔다. 안동 지역에는 3월 18일 안동면 독립만세운동 이후 각처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면의 경우,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가하였다가 귀향한 유동시(柳東蓍)가 협동학교(協東學校)의 유동태(柳東泰), 이균호(李均鎬), 유연성(柳淵成) 등과 협의하여 3월 21일 편항시장 장날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3월 21일 오후 1시경 유연성 등이 편항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권용이는 진보에서 참여한 유춘흠, 안봉익, 조학이 등과 함께 시위 군중의 대열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편항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들의 숙사(宿舍) 2동(棟)과 의류 및 기물을 파기하였으며, 또 임동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숙직실을 파괴하고 서류 및 비품을 훼손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하여 건물 및 서류·기물 등을 파괴하면서 22일 오전 2시경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3월 25일 영덕 출신의 권태원(權泰源)이 주도한 진보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권용이는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의 지원을 받은 안동경찰서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검 안동지청에서 심문을 받고 소위 소요(騷擾), 건조물 손괴(損壞), 가택 침입, 상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였는데, 1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고 징역 2년으로 확정됨에 따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임동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유춘흠·조학이는 징역 2년 6월, 안봉익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