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99
한자 朴壽燦
영어공식명칭 Park Suchan
이칭/별칭 양정(養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 박수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박수찬 영릉의진 참모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박수찬 구속 및 방면
몰년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 박수찬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0년연표보기 - 박수찬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경상도 진보현 월전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해군 남면 복평리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활동지 경상북도 영덕군
성격 의병
성별 남자
대표 경력 영릉의진 참모장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박수찬(朴壽燦)[1867~1922]은 1906년 3월 처남 신돌석(申乭石)과 함께 경상북도 영덕에서 영릉의진(寧陵義陣)을 일으키고 참모장(參謀將)으로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러나 어린 아들 박덕술(朴德述)의 지극한 효행으로 풀려났다.

[가계]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양정(養亭). 1867년 10월 27일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돌석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활동 사항]

박수찬은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조약(乙巳條約)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향촌에서 처남 신돌석과 함께 영릉의진을 일으키고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박수찬은 신돌석의 매부였는데 같은 동리에 살고 있었다. 신돌석은 경상북도 영해군 남면 복평(福坪)[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향리에서 의진을 조직하였는데, 그때가 1906년 4월 6일[음력 3월 13일]경이고, 그 규모는 100~3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 신돌석은 의진의 이름을 영릉(寧陵)이라 하였고 자신이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되었다.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에 따르면, 대장(隊將) 신태호(申泰浩), 참모장 박수찬·김병두(金秉斗), 도선봉장(都先鋒將) 한영육(韓永育), 도령장(都令將) 임경호(林京鎬)·한용수(漢鎔洙) 등 61명으로 확인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박수찬은 신돌석의 매부이고, 도령장 한용수는 신돌석의 처남이었다.

박수찬은 이처럼 영릉의진 지휘부 명단에 참모장으로 올랐다. 하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참모장으로서의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 지역에 전해 오는 말에 재가참모(在家參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비추어 보면 박수찬은 참모장으로 직접 참여하였다기보다 후방에서 자금 지원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수찬은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경상북도 청송으로 이송되었다. 박수찬의 부인은 한 해 전인 1905년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10살이 채 안 된 박덕술[아명 술이(述伊)]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어린 아들이 잡혀간 아버지를 찾아다니며 매일 끼니를 날랐고, 아버지가 청송으로 잡혀가자 그곳까지 따라가서 옥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박수찬이 사형을 당할 위기에 이르자 어린 아들 덕술이 나서 대신 죽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일본군 장교도 그 효성에 감복하여 같은 해 6월 아버지 박수찬을 풀어주었다. 그 뒤 영해군수 경광국(慶光國)은 그 효행을 칭찬하여 복평마을 이름을 효촌(孝村)이라고 하였고, 내부(內部)에 효자로 추천하여 표창을 신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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