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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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相鎔 |
영어공식명칭 | Shin Sang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 신상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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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신상용 흠치교 8인조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25년 - 신상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신상용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도 진보현 합강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진보군 합강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흠치교 8인조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신상용(申相鎔)[1876~1925]은 1920년 음력 7월 흠치교(吽哆敎)에 입교하여 흠치교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신념으로 교도 조직과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 잡혀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신상용은 상위자인 신규환(申圭煥)의 권유를 받아 1920년 음력 7월 청송군 합강리 마을 거주지에서 치성(致誠)을 행하고 흠치교 8인조에 가입하였다. 흠치교의 목적은 종교를 표방하여 치성비라 칭하는 많은 군자금과 다수 교도의 집단을 만들어 1924년 갑자년에 국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호응하여 일제히 일어나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신상용은 이러한 취지에 찬동하고 교도의 조직과 독립자금 모집에 나섰다.
흠치교의 조직은 교주 아래 60방위[고문]가 있고, 60방위 아래 각자 하위 조직인 6인조, 12인조, 8인조, 15인조를 조원 모두가 각각 둘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치성비도 60방위는 50원, 6인조는 30원, 12인조는 15원, 8인조는 10원, 15인조는 5원씩을 각자 출자하도록 하였다. 신상용은 8인조에 가입하여 치성비 7원을 납부하였다. 치성비는 일부는 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상위자를 통해 전라도 정읍에 있는 흠치교 본부로 보냈다. 치성을 행할 때는 닭의 생피 또는 산수(山水)를 마시고 옥황상제에게 제사하고 상위 사람에게 모든 비밀을 지킨다는 맹세를 하였다.
신상용은 8인조 교도로서 부하 15인조를 조직하기 위해 신상진(申相晋) 외 13명에게 입교할 것을 권유하였고, 김상숙(金相淑) 등 7인에게 치성비 29원을 징수하여 상위자 신규환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조원들에게는 자신이 상위자에게 선전받은 대로, 흠치교의 개조(開祖)는 강증산(姜甑山)[강일순(姜一淳)]이지만 사망하였고,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교주(敎主) 차경석(車京錫)인데, 교주는 1924년 갑자년에 천하를 통일하여 제위에 오르면서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게 된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잡혀 1921년 4월 22일 1919년의 제령 제7호[경찰범 처벌 규칙]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하지만 그해 12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 판정을 받았고, 1922년 2월 27일 고등법원에서도 상고 기각 판정을 받아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