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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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滋瑛 |
영어공식명칭 | Yoon Jayeong |
이칭/별칭 | 소야(蘇野),소야(笑也),윤석한(尹錫漢),윤석한(尹石漢),정일영(丁一英),불가살(不可殺),Chen M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영범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9월 13일 - 윤자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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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8년 4월 - 윤자영 경성전수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윤자영 3.1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말(또는 1922년 여름) - 윤자영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윤자영 국민대표회의 참석 및 의열단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윤자영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7월 - 윤자영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2월 - 윤자영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10월 - 윤자영 국내 잠입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 및 확대·강화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5월 - 윤자영 일경의 수사망을 피해 북간도로 탈출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윤자영 소련에서 스탈린의 정치적 대숙청 때 피체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10월 14일 - 윤자영 총살형으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4년 08월 15일 - 윤자영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1길 60-8[금곡리 749]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60 |
학교|수학지 | 경성공업전습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
학교|수학지 | 경성전수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통 |
학교|수학지 |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 러시아 모스크바 |
활동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
활동지 | 함경남도 함흥시 |
활동지 | 중국 상하이, 지린성 툰화현, 닝안현 닝쿠타, 옌지현 룽징촌 |
활동지 |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윤자영(尹滋瑛)[1894~1938]은 20대 중반 때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운동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고 나온 후, 초기 청년운동 및 사상운동 대오의 선두에서 활동하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들어가 곧 중요 인물이 되어, 국민대표회의 때 개조파(改造派)의 거두로 활약한 후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창립을 주도하였고 의열단(義烈團) 고위간부도 지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창립된 후인 1926년부터 공산주의운동에 전념하여 만주 지역에서 수차 비밀조직을 설립하고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0년 국내로 잠입하여 당 재건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후 소련으로 건너가 있던 중 스탈린(I. Stalin)의 정치적 대숙청의 그물에 걸려 처형되었다. 성인기 이후로 줄곧 민족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두 전선에서 분투 헌신하다 일생을 마친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소야(蘇野·笑也), 이명은 윤석한(尹石漢), 별명은 불가살(不可殺), 초명(初名)은 윤석한(尹錫漢). 1894년 9월 13일[관공서 문서들의 기록임. 윤자영 자신의 나이 표기에 따르면 1896년생이고 자필 이력서에도 1896년 10월 19일생임] 청송군 청송면 금곡동 749번지에서 빈농 윤만박(尹晩鎛)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윤계원(尹啓遠)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장(五衛將)을, 부친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안동권씨(安東權氏)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헤어져 살았다.
[활동 사항]
윤자영은 1913년경 상경하여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 도기과(陶器科)를 졸업하였고, 1917년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 들어가 기수(技手)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1918년 3월 퇴직하고 4월에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후일 경성법학전문학교가 되었다가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계승]에 입학하였다. 1919년 1월 하순부터 3.1운동 계획에 가담하여 전수학교 연락책이 되었고, 3월 1일 종로 일대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경찰에 붙잡혀가 검사국 예심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고, 1920년 5월 27일 서대문감옥에서 감형 출옥하였다.
그 얼마 후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과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 가입하였으며, 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2편의 논설·시·시조를 기고하여 실었다. 1921년 5월부터는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전국 순회 강연단의 일원이 되어, 평안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경상남도의 여러 곳을 방문하며 활약하였다. 그 어간(於間)에 비밀결사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입문하고, 1921년 말에서 이듬해 여름 사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당 기관지 『효종(曉鐘)』[‘새벽종’의 뜻]과 기관신문 『투보(鬪報)』의 편집에 참여하며 기고하였다.
1922년 10월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양 파[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연합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의 일원으로서 의사진행을 주재하였다. 대회 종료 후 보고를 위해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로 갔는데, 대회 결의 내용이 승인되지 않고 오히려 양 파 해산이 명령됨과 더불어 고려공산당 중앙총국[통칭 꼬르뷰로]이 신설되고, 윤자영은 그 위원으로 선임된 후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1923년 2월 중순부터 국민대표회의 석상에 등장한 윤자영은 개조파의 한 축을 이룬 상해파 고려공산당 그룹을 이끌면서 회의 운영을 주도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 존폐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6월에 폐회된 후, 윤자영은 7월에 임시헌법 개정 기초위원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윤자영은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제반 활동을 기획·지휘하는 5인 참모부의 일원이 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단원 김지섭(金祉燮)의 일본행 밀항을 적극 주선해주어, 1924년 1월 5일 도쿄 황궁 앞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投彈義擧)가 감행될 수 있게 하였다.
1924년 4월 5일 중국 상하이에서 ‘민족적 일치단합’의 기치 아래 임시정부 안팎의 독립운동 세력을 모두 규합하는 통일전선 조직으로 청년동맹회 창립을 주도하였고, 상무집행위원으로서 운영의 중심적 역할도 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을 ‘공포론(恐怖論)’으로 규정짓고 비하하는 듯한 청년동맹회 선언서 발표에 책임이 있다 하여 1924년 11월 의열단원에게 구타당하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곧 사과를 받았다.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지 만 1년 후인 1926년 4월 지린성[吉林省]으로 옮겨가서 최원택(崔元澤)·조봉암(曺奉岩) 등 화요파(火曜派) 인사들과의 협의에 의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설립하고 선전부장이 되었다. 닝안현[寧安縣] 닝쿠타[寧古塔]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다, 화요파가 주도권을 쥐고 전관하니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1927년 7월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상해파만으로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在滿朝鮮共産主義者同盟)을 결성하였다.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가 발표되자 1929년 2월 지린성 툰화현[敦化縣]으로 이동하여 김철수(金錣洙)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한동안 기관지틀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하다 김철수 외 동지 여러 명의 뒤를 이어 1930년 10월 국내 잠입하였다.
그 후 김일수(金一洙)·조덕진(趙德津)과 함께 함경남도 일대에서 산업노동자들을 포섭하면서 당 재건의 세포 조직이 될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 및 확대·강화에 주력하였다. 그 성과는 4개 지방기관 설립, 전국 10여 개 도시 및 철도 연변의 다수 공장들에서의 비밀 세포기관[야체이카]과 좌익 노동조합 조직으로 나타났다. 그런 낌새를 챈 일제 경찰이 1931년 5월 대검거를 개시하여 전국에서 수백 명이 체포될 때, 윤자영은 수사망을 벗어나 북간도로 탈출해 갔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에 가입하고 ‘정일영(丁一英)’으로 이름을 바꾸어, 만주성위원회 동만주특별위원회(東滿特別委員會) 조직부에 소속되었다.
1932년 9월 중국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국제레닌학원 입학을 위해 모스크바로 갔는데, 입학 청원은 각하되고 그 대신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들어가 수학할 수 있었다. 거기서 윤자영은 Yun Za Yen으로 본명을 표기하면서 Chen Min이란 가명도 썼다. 1934년 12월 소련 최고통치자 스탈린의 정치적 대숙청 작업이 개시된 후, 윤자영은 ‘반당분자’로 낙인찍힌 지노비에프(G. Zinoviev)의 동조자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1938년 10월 2일 카자흐스탄 북쪽의 노보르시비르스크주(州)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반혁명’을 이유로 총살형을 선고받고 10월 14일 집행되었다. 스탈린 사후 1958년 12월에 윤자영의 처형은 부당한 것이었음이 인정되고 명예회복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