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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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學伊 |
영어공식명칭 | Yoon Hag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 윤학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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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6월 - 윤학이 신돌석 의진에 입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윤학이 일경에 피체, 투옥 |
추모 시기/일시 | 2013년 - 윤학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진보군 동면 금조암동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
활동지 | 경상북도 청송군|울진군|영덕군|영양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윤학이(尹學伊)[1873~?]는1908년 6월 경상북도 영덕에서 창의한 신돌석 의진(申乭石義陣)에 입진하여 울진, 영해, 청송, 영양 등지에서 군량미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강제 체결에 격분한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 경상북도 영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해안 및 산간 지대를 오르내리며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하지만 증강된 일본군 토벌대의 추격과 탄약과 장비 및 군량미의 부족으로 의진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윤학이는 1908년 6월 신돌석 의진에 입진하여 군량미 확보에 힘을 쏟았다. 또한 신낙선(申洛善) 등 의병 50여 명과 함께 울진군 황정촌(黃亭村)에서 쌀 5두(斗)를 모집하였고, 같은 해 7월 영해군 오기동(烏基洞)에서 쌀 7두를 징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송군 진보(眞寶)와 영양군 석보(石保) 등지를 오가며 쌀 16두를 거두어 군량미로 사용하는 한편, 청송군 진보읍에 사는 권탑동(權塔洞)의 집에 가서는 군자금 70냥을 징수하였다.
1908년 7월 10일 청송군 진보에 주재한 순사들이 공격해 오자 피신하였으나 곧 붙잡혔다. 1908년 9월 28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폭동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9월 5일 신낙선 등과 함께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따른 대사령(大赦令)으로 약 2년 만에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