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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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龍相 |
영어공식명칭 | Lim Yongsang |
이칭/별칭 | 임병오(林炳五),중호(中虎),충서(忠瑞)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7년 5월 22일 - 임용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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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임용상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임용상 산남의진 합세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임용상 산남의진 좌포장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임용상 운문산 지역에서 의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임용상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임용상 출옥 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54년 - 임용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임용상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72년 - 임용상을 기리는 중호임용상의사상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78년 - 임용상을 기리는 중호임용상의사유허비 건립 |
출생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수락리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
묘소 | 신암선열공원 애국지사 묘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5동 산27-1]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좌포장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임용상(林龍相)[1877~1954]은 1905년 의병을 일으킨 뒤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1908년 이후 청도, 청송,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잡혀 10여 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출옥 후 의열단(義烈團)과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 이명은 임병오(林炳五). 1877년 5월 22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동에서 임효수(林孝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임용상은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산남의진에 합세하였다가 의진이 일시 해산되자, 영덕군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가 군사를 정비하여 이끌고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4월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키자 이에 합진하여 청하읍을 점령하고 좌포장(左捕將)이 되어 청송, 영천, 신령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 뒤 임용상은 청송, 진보 지역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07년 10월 포항 죽장면 입암전투(笠巖戰鬪)에서 대장이 전사하는 등 지휘부가 무너지자 달려가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진을 수습하였다. 이후 청송, 흥해, 경주, 영천, 신령 등 여러 곳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임용상은 대장의 명을 받고 경주 주사산성(朱砂山城)[부산성(富山城)]으로 들어가 신입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본진은 의성, 군위, 청송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대구 주둔 일본군의 공격으로 본진의 활동이 매우 위축되었다. 이때 주사산성도 위험해지자 산성의 의병을 청도 운문산(雲門山)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 정환직 대장이 순국하자, 임용상은 1908년 3월 보현산(普賢山)에서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전술을 지대별 유격전으로 바꾸었다. 임용상은 운문산 지역을 맡아 경주, 언양, 밀양, 영산 등 여러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였다. 1908년 6월 울주군 언양분견소(彦陽分遣所)를 공격하여 이곳 일본군을 처단하고 분견소를 불태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되었다. 1909년 9월 대구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옥고 1년 만에 풀려났다.
1910년 4월 다시 보현산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청송을 공격한 뒤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의성 안평전투(安平戰鬪)에서 붙잡혔다. 임용상은 대구로 압송된 뒤 1910년 7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0년 만기 출옥한 뒤 의열단 및 군정서(軍政署) 등을 통하여 군자금 조달에 힘쓰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묘소]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5동 산27-1]에 위치한 신암선열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산남의진기념사업회는 1985년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서포중학교 뒤편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외에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생가터에는 1978년 세운 중호임용상의사유허비가 있으며,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공원에는 1972년 세워진 중호임용상의사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