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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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性訥 |
영어공식명칭 | Cho Seongnul |
이칭/별칭 | 탁성(琢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35년 - 조성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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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3월 - 조성눌 청송의진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02년 12월 14일 - 조성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조성눌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
활동지 |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송의진 백의종사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조성눌(趙性訥)[1835~1902]은 1896년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창의 과정에 참여하여 백의종사(白衣從事)로 활동하였으며, 향도청(鄕都廳)을 맡아 군량미의 출입을 주관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탁성(琢成). 1835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에서 아버지 조윤호(趙倫祜)와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예로 입향조 망운(望雲) 조지(趙址)가 청송 안덕(安德)에 들어와 살면서 조지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조성눌은 1896년 3월 청송의진의 창의 초기부터 참여하였다. 1896년 3월 8일 안동의진(安東義陣)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으로 들어와 청송군 관아의 군기(軍器) 탈취를 시도하고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을 청송 유림들에게 보내자 이에 고무된 청송 유림들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걸고 창의를 추진하였다.
3월 12일 청송 유림 200여 명과 함께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하였다. 청송 유림들은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창의장(倡義將)으로 심성지(沈誠之)를 추대한 뒤, 권탁수(權鐸洙), 이중성(李中性), 민성호(閔晟鎬) 등과 함께 향론을 결집하였다. 3월 15일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을 내정하고, 참모(參謀)와 서기(書記) 이하를 선발하였다.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창의하였다.
3월 17일 조성눌은 권탁수, 심관지(沈灌之), 서효원(徐孝源), 민성호, 이중성 등과 함께 6인의 백의종사에 차출되어 축문(祝文)과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며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청송의진이 3월 28일 모량도청(募糧都廳)과 백의종사를 혁파하고 효율적인 군량미 수집을 위해 향도청을 설치할 때, 조성눌은 심능열(沈能說)과 함께 향도청의 군량미 출입을 주관함으로써 청송의진의 진용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조성눌은 청송의진이 국왕 고종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하는 8월까지 활동하였다. 1902년 12월 1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