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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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學伊 |
영어공식명칭 | Jo Hak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조학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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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조학이 편항장터 만세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 조학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3년 - 조학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도 진보현 부곡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부곡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학이(趙學伊)[1890~1953]는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中平洞) 편항(鞭巷)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경상북도 안동군에서도 안동읍과 예안읍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이웃한 임동면에서는 유연성(柳淵成) 등이 3월 21일 오후 2시 중평동 편항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조학이는 임동면에서 만세운동이 추진된다는 사실을 알고 때를 기다렸다. 임동과 고향 청송 진보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였다. 조학이는 1919년 3월 21일 오후 1시경 만세운동이 계획된 임동면 중평리 편항 장터로 달려갔다. 이곳에는 이미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유연성을 비롯하여 유곡란(柳谷蘭), 박진성(朴晋成), 이강욱(李康郁), 배대근(裵大根) 등 지도층 인사 10여 명이 독립 만세를 외치자 군중도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일본인 순사 우치다[內田甚助]가 달려와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성난 군중의 기세에 눌려 경찰주재소(警察駐在所)로 도주하였다.
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향하였다. 조학이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들어가 경찰이 휴대한 무기 등 주재소 안의 모든 무기를 빼앗고 경찰을 제압하였다. 조학이는 군중과 같이 순사 우치다와 순사보 권태석(權泰奭)을 심하게 구타하였다. 이때 일본인 순사 오카다[岡田]는 임하면 신덕리 주재소로 도주하였다.
조학이는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총과 칼, 탄약 등을 몽땅 그곳 우물에 버리고, 다시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밤늦게까지 중요 서류와 비품들을 파괴하였다. 군중은 22일 오전 2시경에 모두 흩어졌다. 조학이는 이 일로 붙잡혀 같은 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정으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