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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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世紀 |
영어공식명칭 | Lee Segi |
이칭/별칭 | 사옥(士玉),이석(李錫)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9월 8일 - 이세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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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3월 - 이세기 심성지의 청송의진에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이세기 정용기의 산남의진에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이세기 정환직의 산남의진에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이세기 독자적 의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7월 - 이세기 은신 중 체포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07월 25일 - 이세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이세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고와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청송군 |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산남의진 초장|좌포장|후봉장|중군장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이세기(李世紀)[1882~1911]는 1896년 심성지(沈誠之)의 청송의진(靑松義陣)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1906년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입진하여 활동하였으며, 1908년 최세윤(崔世允) 대장이 잡힌 뒤부터는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잡혀 3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1년 7월 옥문을 부숴 동지들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피살,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월성(月城). 자(字)는 사옥(士玉), 이명은 이석(李錫). 1882년 9월 8일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서 이후(李後)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세기는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등에 반대하여 1896년 3월 경상북도 청송에서 일어난 심성지의 청송의진에 들어가 항쟁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늑약기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수십 명의 동지들을 모아서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일어난 산남의진에 합세하였다. 처음에는 대장 정용기의 초장(哨長)으로 선임되었으나 곧 좌포장(左砲將)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6년 4월 대장 정용기가 구속되자 의진은 구심점을 잃고 곧 해산되었다. 그 후 이세기는 의진의 재기를 위해 청송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1907년 4월 정용기가 재기하자 이에 합세하여 후봉장(後鋒將)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영일군 죽장면에서 벌어진 입암전투(笠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장령(將領)들이 전사하고 의진이 무너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세기는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을 대장에 추대하고 중군장(中軍將)으로 활동하던 중 1907년 12월 정환직도 순국하였다. 이세기는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1908년 3월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中軍)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최세윤마저 잡히자 이세기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이끌고 영일군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겨우 피신을 하였다. 이세기는 은신 중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된 뒤 재판정에서도 끝까지 항거하다 징역 30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나, 옥문을 부수고 동지들을 탈출시키다가 잡혀 1911년 7월 25일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기룡산(騎龍山) 아래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산남의진기념사업회는 1985년 죽장면 입암리 서포중학교 뒤편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