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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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宜洙 |
영어공식명칭 | Lee Ui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38년 12월 8일 - 이의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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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3월 - 이의수 청송의진 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04월 13일 - 이의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이의수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
활동지 |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송의진 종사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이의수(李宜洙)[1838~1907]는 1896년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1838년 12월 8일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이진규(李鎭奎)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의수는 1896년 3월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다. 1896년 3월 8일 안동의진(安東義陣)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군 관아의 군기(軍器) 탈취를 시도하고, 거의(擧義)를 촉구하는 격문을 향중에 발하며 창의(倡義)를 촉구하자, 이에 고무된 청송 유림들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창의를 추진하였다. 3월 12일 청송 유림 200여 명과 함께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하였으며,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창의장(倡義將)으로 심성지(沈誠之)를 추대하였다. 이리하여 청송의진은 창의장 심성지를 비롯하여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중군장(中軍將) 김대락(金大洛),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 우익장(右翼將) 남두희(南斗凞), 사병도총(司兵都摠) 남승철(南昇喆),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 서효원(徐孝源) 등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그 뒤 청송의진은 의병 활동 과정에서 군비의 효율적인 모집과 운용을 위해 4월 6일과 4월 29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지휘부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4월 29일 참모(參謀) 신동호(申東鎬)가 주도하여 각 부대를 창의장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상영(上營)[총영(摠營) 혹은 내영(內營)]과 그 아래 각영(各營)으로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심규(沈硅)와 조규락(趙奎洛)을 지휘사(指揮使)로 삼고, 조성로(趙性魯), 조성원(趙性源), 심응규(沈能奎), 민동호(閔東鎬), 조광규(趙光奎)를 참모로 삼고, 조성태(趙性台), 심의택(沈義澤), 남상현(南相鉉)을 서기(書記)로 삼았다. 그리고 이의수는 신익한(申翊漢), 조능호(趙能祜) 등과 함께 종사에 임명되었다. 이의수는 청송의진이 의병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진영을 해산하는 8월까지 활동하였으며, 1907년 4월 1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