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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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來祥墓碑 |
영어공식명칭 | Jeongraesang Tomb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원미경 |
건립 시기/일시 | 1717년(숙종 44) - 정래상 선정불망비[놋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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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일제 강점기 - 정래상 묘비 현 위치로 이전 건립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89년 10월 01일 - 정래상 묘비[석비] 건립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43년(인조 21) - 정래상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17년(숙종 44) - 정래상 사망 |
현 소재지 | 정래상 묘비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 |
원소재지 | 정래상 선정비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옛 관가 앞 길가 |
성격 | 비 |
양식 | 비좌개석(碑座蓋石)형 |
재질 | 놋쇠[원래 비석]|화강암[현재 비석 개석]|대리석[현재 비석 비신]|화강암[현재 비석 대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45㎝[높이]|36㎝[폭]|15㎝[두께] |
소유자 | 정래상 후손 |
관리자 | 정래상 후손 |
[정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철원부사를 지낸 정래상의 묘비.
[개설]
정래상(鄭來祥)[1643~1717]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내지(來之)·대숙(大淑)이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수(鄭修)의 아들이다. 1679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괴원(承文院槐院)을 거쳐 홍문관 정자(正字)·교리(敎理)·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693년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고 여러 곳 수령을 지냈다. 60세 되던 해인 1703년 8월 철원부사로 부임하여 1706년 1월까지 청렴결백한 생활로 이도(吏道)를 빛냈고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17년(숙종 44) 1월 2일 정래상이 죽자 숙종은 선정치적을 높이 사 ‘시민여상 부모은심 거관청백 미옥기심(視民如傷父母恩深居官淸白米玉其心)’이라는 유시(遺詩)를 보냈다. 정래상 묘비는 1717년(숙종 44) 백성들에 의해 놋비로 건립되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1989년 10월 1일 새로운 석비로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정래상 선정불망비(善政不忘碑)는 원래 공의 선정치적을 추앙하며 철원부민들이 놋그릇과 수저 등을 모아서 숙종이 보낸 유시를 양각으로 주조하여 철원읍 옛 관가 앞에 세웠다고 한다. 옛 놋비는 200년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현재 위치로 옮겼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었고 40년간 대석만 덩그런히 놓여 있었다. 광복 이후 정래상의 후손들이 놋비를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하여 석비에 숙종의 송시(頌詩)를 음각한 다음 1989년 지금의 자리에 묘비를 세웠다.
[위치]
정래상 묘비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 금연저수지 아래에 있다.
[형태]
정래상 묘비는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로 높이 145㎝, 폭 36㎝, 두께 15㎝이다. 원비(原碑)는 놋비이며 돌로 만든 현비(現碑)의 개석은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 대석은 화강암이다.
[금석문]
정래상 묘비에는 ‘통정대부 승정원우부승지지제교 정래상지묘(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知製敎鄭來祥之墓)[정부인 파평윤씨묘부(貞夫人坡平尹氏墓祔)]’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정래상 묘소에는 약간의 석물과 비석이 동쪽을 바라보고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묘소 아래쪽으로 도로변에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새로이 건립한 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정래상은 철원부사를 지낸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정래상이 죽은 뒤 숙종이 유시를 보낼 정도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인물이다. 정래상의 원래 비석을 백성들이 놋그릇과 수저 등을 모아 세웠을 정도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