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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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鎭根 |
영어공식명칭 | Kwak Jinke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찬호 |
출생 시기/일시 | 1861년 - 곽진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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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곽진근 철원읍 3·1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1일 - 곽진근 철원역 만세 시위 중 일본 경찰에 검거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25일 - 곽진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21일 - 곽진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형에 벌금 10원 확정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곽진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수훈 |
출생지 | 관전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
거주|이주지 | 관전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
활동지 | 철원 - 강원도 철원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곽진근(郭鎭根)[1861~?]은 1861년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전도사 신분으로 기독교인들을 이끌고 철원 읍내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뒤 철원의 천도교인들은 최병훈(崔炳勳)이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에서 가져온 「3·1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이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감리교 목사인 박연서(朴淵瑞)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계열이 주축이 되어 3월 10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0일의 철원읍 만세 운동은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의 학생들, 기독교인과 지역 청년의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철원군청에서 합류하였고 곽진근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군청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고, 저녁에는 월하리에 있는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으로 몰려가서 박의병으로 하여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에도 시위가 계속되어 서문거리에 모였던 시위 군중은 철원역으로 향하였다. 철원역에 모인 곽진근을 비롯한 700여 명의 군중은 정차한 기차를 향해 독립 만세를 외쳤고 기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은 다시 읍내로 돌아와 시위를 이어 가다가 서문거리에서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곽진근 이날 시위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11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벌금 10원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곽진근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