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303 |
---|---|
한자 | 三國-要衝地-文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창석 |
[정의]
삼국 시대 요충지였던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강원도 철원 지역은 영서예 세력이 살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서 삼국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장소였다.
[낙랑군의 지배와 그 흔적]
강원도 철원 지역에는 고대에 예족 계통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3세기 이전의 상황을 전해 주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예’ 항목을 보면, 함경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에 예족 집단이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낭림산맥과 태백산백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에 형성된 정치체를 (영)동예, 그 서쪽에 살던 주민 집단을 영서예라고 부른다. 영서예 지역은 고조선에 의하여 복속되었다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땅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4개의 군 가운데 임둔군의 지배를 받았다. 원래 이곳에 임둔이라는 정치체가 있었기 때문에 군의 이름을 임둔군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임둔군은 곧 폐지되고 철원 지역은 낙랑군으로 이관되었다.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 유적,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낙랑계 토기와 무기류는 그 증거 자료이다.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는 아직 낙랑군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된 바 없으나 파주, 가평, 포천, 화천, 춘천 등 주변 지역에서 낙랑계 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조사가 진전되면 낙랑군의 흔적이 발굴될 가능성이 높다. 철원 와수리 유적에서 철경동촉, 주조철부, 손칼, 무경식 철촉 등이 출토된 바 있는데, 이 유물들은 낙랑계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한나라는 아시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낙랑군이 비록 고조선 고지를 통제하기 위한 지배 기구였지만 우수한 수공업 기술과 선진적인 정치제도, 행정체제가 도입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남진과 철원 지역]
낙랑군이 쇠퇴하여 313년 망하게 되자 철원 지역에 백제가 잠식하여 들어왔다. 강원도 춘천시와 화천군 원천리 유적에서 토기, 무기, 장신구 등 백제 유물과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 즉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부터 추가령구조곡을 통하면 철원 방면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4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철원에도 백제가 진출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5세기 말 광개토대왕 때가 되면 고구려가 백제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한다.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영락 6년(396)에 백제의 58성 700촌을 빼앗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예성강, 임진강, 한탄강 유역과 북한강 상류 지역이었다. 마한의 한족과 영서예가 분포하던 지역 가운데 북부에 해당하며 따라서 철원 지역도 이때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춘천시 방동리에 있는 돌방무덤은 천장이 고구려식의 모줄임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이로써 그 당시 고구려인들이 영서 북부 지역에 들어와 살았음을 뚜렷이 보여 준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있는 도피안사 경내에 삼층석탑이 있다.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鐵原到彼岸寺三層石塔)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과 비교하면 차이가 나는 이형탑인데, 특히 기단부가 평면 팔각형을 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평양에 있는 청암리 사지의 탑지가 평면 팔각형인 점을 근거로 삼아서,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에 대하여 기단부는 고구려의 불교 문화, 그리고 탑신부 이상은 신라의 문화가 결합된 결과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광개토대왕 때의 백제 공략 이후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철원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이 확고해지면서 그 문화가 수용되었고, 고구려의 불교 전통이 통일신라 말까지 지속되어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에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철원을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철원(鐵圓)이라고 썼다. ‘모을’을 뜻으로 읽어 ‘털’의 의미이므로 원래 예족, 백제, 또는 고구려의 말로 ‘털’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표기할 때는 그 음을 따서 ‘철(鐵)원’이라고 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철원은 광물 쇠와 무관한 지명이 되지만, 철원 지역은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대지가 펼쳐져 있어 현무암의 검은 색채가 철광석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모을동비의 어원과 상관 없이 고구려 때의 철원이라는 지명은 이곳을 철과 관련시킨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신라의 북상과 삼국 각축전 속의 철원]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죽령을 넘어 북진하고 다시 남한강 줄기를 따라 하류역으로 서진하였다. 550년 무렵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단양적성비’를 보면 고구려 땅이었던 적성을 신라가 점령하는 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아이차라는 인물을 포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단양은 소백산맥 이북이므로 이때 신라가 소백산맥을 돌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명하여 죽령으로부터 북쪽으로 나아가 고현이라는 높은 고개까지 진격하도록 하였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전한다. 이 당시 신라는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는데, 신라가 빼앗은 군에 철원 지역까지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늦어도 우수주가 신설되는 637년(선덕여왕 6) 전에 철원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였다. 6세기 말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삼국 간의 각축전과 이어지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철원 지역은 특히 신라와 고구려와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직후인 669년부터 신라-당 사이에 나당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크고 작은 전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철원은 한반도 중부 내륙 지역에 자리 잡아 삼국의 경계 지점에 속하여 있었다. 백제의 동단이면서 고구려의 남단이고 신라의 북단에 철원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철원은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 추가령구조곡의 중간 지점에 있어 철원을 장악하면 한강 하류 지역에서 경기도 북부, 강원도 영서 북부를 거쳐 원산만까지 갈 수 있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춘천, 화천에서 철원을 거치면 북서쪽으로 황해도의 토산, 평산, 신계, 서흥, 봉산, 황주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한탄강, 임진강 수계를 통해 서해로 진출하기도 수월하였다. 철원이 가지고 있던 지정학적 경계성, 교통로상의 결절점이라는 특성이 결국 철원을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시켰고 삼국은 철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영서예 주민의 생활과 문화]
철원 지역에서 철기문화가 시작되는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라고 추정되는데 그 주민은 예족에 속하였다. 이를 영동의 동예와 대비하여 영서예라고 부른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고구려가 새로 획득한 이종족 집단을 ‘신래한예(新來韓穢)’라고 부르고 광개토대왕과 역대 국왕의 능묘를 수호하는 수묘인으로 이들을 차출하였음을 기록하였다. 한족은 마한의 종족이고, 예족은 바로 철원을 포함하여 영서 북부 지역에 살던 영서예 집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삼국지』와 같은 중국 사서뿐 아니라 당시의 고구려 사람들도 철원의 주민이 종족적으로 예족에 속한다고 인식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들은 철기 시대 이래로 경질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출입구가 달려 있는 특징적인 주거지에서 살았다. 이러한 생활 모습은 동예가 있던 영동 지역에서도 확인되어 이들이 같은 예족에 속한 집단이었음을 보여 준다. 예의 습속인 무천, 호랑이 숭배, 책화, 그리고 장창을 들고 보병 전술을 펴는 모습도 철원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만 지배층의 무덤 형식이 영서의 경우는 돌무지무덤을 썼으나 영동에서는 이런 무덤이 소수만 확인되어 차이가 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는데, 크게 보면 영서와 영동에 분포한 예족 주민들이 철기 시대 이후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문화에서도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외래 문물의 수용과 문화 복합]
철원 지역이 문화의 교차로에 있었던 만큼 주민들은 자신의 고유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주변 세력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외부에 영향을 끼쳤다. 문화의 소통과 융합이 일어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래 철원의 영서예 집단들이 사용한 토기는 중도식 토기라고 불리는 경질민무늬토기였다. 이에 비하여 낙랑군을 통하여 유입된 토기는 일률적이지 않지만 더 고운 태토를 써서 부드러운 질감이 나고 석영, 활석 등을 첨가하여 밝은 색조를 띠었다. 성형을 할 때도 물레를 사용하여 회전물손질로 마무리를 하였다. 새로운 토기 제작 기법은 재래의 토기 문화에 자극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무기류 역시 마찬가지다. 예족은 길이가 긴 창을 만들어 여러 명이 이것을 들고 적을 공격하는 데 썼다. 보병전에 능하였다고 하므로 기병은 상대적으로 약하였고, 따라서 기병에 맞서서 상대편이 접근하기 전에 긴 창으로 돌진하여 오는 말을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고 보인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스코틀랜드 독립군을 지휘하던 윌리엄 월리스가 잉글랜드 기병을 상대로 펼친 전술을 떠올려 보라. 단병기로는 고조선에 복속되었을 때 유입된 비파형 동검, 그리고 시기가 지나면서 세형동검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경기도 가평의 달전리 유적을 보면, 낙랑계의 화분형 토기와 함께 철제 단검, 환두대도, 말 재갈이 출토되었다. 철제 무기와 마구류는 철원의 재래식 무기로 대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를 개량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소형 주조괭이는 농기구로서 농업 생산을 늘이는 데 기여하였다.
백제로부터는 토기 중 뚜껑류와 타날문을 베푼 새로운 제작기법의 토기가 전래되었다. 고구려로부터는 군사제도와 발전된 행정체제, 즉 문서를 이용한 명령의 하달과 보고 체계, 인민의 파악과 동원 시스템, 법률 등이 도입되었을 터이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신라 역시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의 약 1세기간 고구려의 군사적,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바 있다. 6세기 중엽 이후 철원 지역에 신라가 진출하면서 당연히 신라에서 한 단계 더 성숙된 지방 행정 체계와 수공업 기술, 무기 체계가 소개되었을 것이다. 낙랑군,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주변의 강대 세력이 철원을 차지하면서 다양한 선진 문물이 유입되었고 종래 예족이 갖고 있던 생활 문화, 전통적인 지배 체제 및 사회 질서와 접목되어 복합적인 문화가 출현하였고 마침내 신라 북부 내륙의 중심적인 지방도시의 하나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종족의 변천과 융합]
인간 집단이 일정 지역에 오랜 기간 거주하면서 혼인과 공유된 생활양식을 거듭하게 되면 특정한 종족성을 띠게 된다. 특정 종족은 나름의 고유한 문화, 즉 언어, 습속, 신앙 등을 갖게 된다. 흔히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인간 집단은 민족 단위로 분류한 것이고 민족이 형성되기 전에는 종족 단위의 집단이 만주와 한반도를 무대로 하여 분포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일구었다. 현재 예족, 맥족, 한(韓)족이 확인되며, 철원 지역에 살던 집단은 앞서 말하였듯이 예족에 속하였다.
삼국과 같은 국가 단위는 종족과 달리 정치체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하나의 종족이 여러 정치체를 형성할 수 있고 하나의 정치체가 복수의 종족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예족은 중·남부 만주와 연해주 남부, 그리고 함경도 동해안을 거쳐 북부 강원도 일대는 물론 경기도 북부에도 일부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를 정치체와 대비시켜 보면 고조선, 부여, 옥저, 동예의 주민이 주로 예족에 속하였고 고구려는 맥족, 삼한은 한족으로 대략 구성되어 있었다. 어떠한 종족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 분포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고 나서 또한 주변 세력과의 역학 관계에 따라서 그 분포 범위와 문화 양상이 달라진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영서예의 경우 원래는 낭림산맥 이서가 중심 분포권이었으나 점차 강원 영서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영)동예의 예족은 삼국 시기에는 신라의 울진, 포항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영서예가 형성한 정치체의 이름은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맥국’, ‘말갈 추장 나갈’이 보이므로 대형 읍락으로 성장한 정치체가 있었다고 보인다. 다만 ‘맥’, ‘말갈’은 이들의 실제 종족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신라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여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이들의 종족성은 예족에 속하였다. 영서예의 중심은 춘천에 있었으나 철원, 화천, 가평 등 주변 지역의 세력도 읍락 정도의 정치체를 형성하여 춘천과 연계되어 있었다. 철원 지역에서는 와수리와 군탄리 유적을 춘천 중심으로 형성된 중도유형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다. 중도유형 문화는 원삼국 시기에 영서예 세력이 형성한 것이다. 영서예와 주변 종족과의 융합도 이루어졌다. 특히 경기도 북부에 거주하던 예족들은 남부에 마한의 한족과 접해 있었으므로 일찍이 교류를 통하여 종족 간 혼융이 이루어졌고, 이후 백제의 영서 지역 진출로 본격적인 한족과 예족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진출은 예족과 맥족의 혼융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