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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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敬慕齋[硏經洞] |
이칭/별칭 | 연경동 경모재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45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충희 |
현 소재지 | 경모재[연경동]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4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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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경모재[연경동]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454-1 |
성격 | 재실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인천이씨 공도공파 |
관리자 | 인천이씨 공도공파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있는 이훈을 추모하는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재실.
[개설]
경모재(敬慕齋)[연경동(硏經洞)]는 인천이씨(仁川李氏) 공도공파(恭度公派) 24세손 이훈(李薰)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이훈은 인천이씨 무태(無怠)[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서변동] 입향조인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의 후손이다. 이주가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서 무태로 이주한 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이주는 무태에 환성정(喚性亭)을 지어 강학하였고,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44~1637]·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임진왜란 후에는 대구 지역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망한 뒤에 서변동에 있는 서계서원(西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주의 후손들 중에 서변동과 이웃한 연경동에 거주하는 사람도 많았다. 경모재[연경동]에서 추모하는 인천이씨 24세손 이훈도 연경동에 거주한 이주의 후손이다. 경모재[연경동]는 창건 연대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위치]
경모재[연경동]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454-1에 있다.
[형태]
경모재[연경동]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가운데에 1칸의 대청이 있고, 좌측에 2칸의 방과 우측에 1칸의 방이 있다. 3칸의 방 앞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현황]
경모재[연경동] 앞에 펼쳐져 있던 들판은 ‘연경동 보금자리주택 사업’이 시작되어 아파트촌으로 변모하였으나 경모재[연경동]는 그대로 존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