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천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383
한자 鐵原 遷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904년 - 철원을 새 도읍지로 선정
종결 시기/일시 905년연표보기 - 철원 천도
발단 시기/일시 904년 - 마진 건국
전개 시기/일시 904년 7월(음) - 청주의 1,000가구 철원으로 이주
발생|시작 장소 풍천원(楓川原)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궁예|마진|태봉

[정의]

905년 마진의 국왕 궁예가 송악군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사건.

[개설]

신라 말 철원을 도읍으로 국가를 개창하였던 궁예(弓裔)는 898년 송악군으로 천도 후 901년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변경하면서 통치기구를 전면 재정비하고 철원을 새로운 도읍지로 선정하였다. 철원 천도는 이듬해인 905년에 이루어졌다.

[역사적 배경]

현재의 강원도 영월·원주·강릉 방면에서 활약하던 궁예는 894년 양길(梁吉, 良吉)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뒤 895년 8월 철원 일대를 장악하였다. 896년에는 태봉국 철원성을 도읍으로 삼아 국가를 개창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국호나 정치체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896년 송악군의 유력 호족이었던 왕융(王隆)이 아들 왕건(王建)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궁예가 처음 건국한 나라는 체제가 미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지역에 위세를 떨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898년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 즉 현재의 평안남도부터 충청도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확보한 궁예는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강 하류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인근 호족들의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호족들의 지원 아래 899년에 양길의 군대까지 물리친 궁예는 활발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901년에 왕위에 올랐다. 아울러 국호를 고려로 정함으로써 고구려 계승의식을 명확히 하였다.

[경과]

궁예는 903년에 다시 천도를 계획하였다. 철원과 부양(斧壤)을 답사하고 904년에 철원을 도읍지로 정하였는데,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道詵)이 철원의 금학산(金鶴山)을 진산(鎭山)으로 추천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궁예는 도읍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최신 학설인 풍수지리설도 참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武泰)로 선포한 뒤 광평성(廣評省) 이하 중앙정치기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관부·관직·관등의 전면 개편은 왕권 강화 및 중앙집권화의 진전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궁예가 기존의 철원성과는 전혀 다른 풍천원(楓川原)에 대규모의 궁궐을 조성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마진 건국을 즈음하여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결과]

철원 천도를 결정한 궁예는 904년 7월[음력] 청주의 1,000가구를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905년 왕실과 관부를 모두 철원의 새로운 도성으로 옮겼다. 또한 연호를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태봉(泰封)으로 국호를 바꾸고 신정적 전제주의를 펼치기 전까지 궁예는 철원을 거점으로 후삼국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의의와 평가]

철원 천도를 통하여 궁예가 달성한 소기의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패서 호족들을 견제함과 동시에 분산되어 있던 궁예의 세력 기반을 통합하였다. 왕융의 귀부를 기회로 삼아 궁예는 패서도를 장악하고 패서 유력 호족들의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활용하였으나,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패서 호족들과 주도권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궁예는 최초의 세력 기반이었던 강원도로 거점을 옮기고 우호적 관계에 있던 청주 백성들을 철원에 이주시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903년 금성군(錦城郡)을 함락시켜 알찬(閼粲)의 지위까지 올랐던 왕건궁예의 견제를 피하고자 전장을 선호하였다는 기록은 패서 일대의 유력 호족과 궁예의 긴장 관계를 방증한다.

둘째, 중국식 제도의 도입을 통한 관료제 강화이다. 신라의 관제를 많이 차용하였던 궁예는 904년의 중앙기구 개편에서 중국의 성(省)·부(部) 체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중국식 제도는 관부나 관직 개편에만 그치지 않고 도성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확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원의 궁예 도성이 자연지형을 활용하는 기존 도성들과 달리 평지에 위치하고 그 규모도 컸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궁예는 도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당나라의 장안성 또는 장안성을 본 뜬 발해 도성을 참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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